미국 정보기관의 전방위적 도청으로 통신감청이 주목받고 있는 가운데, 국내 통신감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정원의 감청이 사실상 법원과 검찰의 아무런 견제 없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감청영장이 너무 쉽게 발부된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전해철 민주당 의원이 최근 공개한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1~8월 검찰은 국정원과 경찰이 신청한 감청영장 111건을 모두 법원에 청구했다. 또 법원은 단 두 건의 감청영장만 기각해 98%의 영장 발부율을 보여줬다. 이처럼 검찰이 청구한 감청영장에 대한 법원의 발부율은 최근 5년간 줄곧 90%를 넘었다. 감청영장은 청구하면 대부분 그대로 발부되는 것이다.

전 의원 "국정원 수사관 등 사법경찰관이 신청한 감청영장을 검사가 100% 그대로 청구하는 것은 누구든 쉽게 감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생활침해 소지가 있는 감청영장에 대해 검찰과 법원이 적절한 통제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국정원
 
국정원, 경찰에 건네지는 통신정보

미래창조과학부가 매년 상, 하반기에 발표하는 통신제한(감청)과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 현황도 중요한 통계로 부각되고 있다. 이 통계는 통신사업자가 수사기관에 제공한 통신정보를 정부가 모아 발표하는 것이다.

통신정보를 요청해 받는 정보·수사기관은 국정원, 검찰, 경찰, 군 수사기관(기무사) 등이다. 이들에게 이용자의 통신정보를 제공하는 건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으로 이동통신과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통신사업자가 모두 포함된다.

수사기관에 제공되는 통신자료는 크게 세 가지로 △감청, △통신사실확인자료, △통신자료다. 감청의 대상은 통화내용, 전자우편(이메일), 인터넷 (비공개)게시물 내용이다. 통신사실확인자료는 수사 대상자와 통화한 전화번호, 통화일시, 발신기지국 위치추적과 인터넷 로그기록, 접속지(IP 주소)를 모두 포함한다.

감청과 통신사실확인자료는 둘 다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수사기관이 법원의 허가(영장)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긴급 상황의 경우 검사 지휘서, 국정원장 승인서만 있어도 제공이 되며 사후 법원 영장을 제출하면 된다.

이에 반해 통신자료는 영장도 필요 없다. 통신 서비스 이용자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ID 등은 수사기관이 요구하면 통신사업자는 언제든지 제공해야 한다. 이에 대해 정보인권단체들은 이용자의 개인정보를 담은 통신자료에 대해서도 법원의 영장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통신제한조치[감청] 건수 (아이디, 전화번호). 출처= 방송통신위원회, 미래창조과학부 ⓒ진보네트워크
 
국내 감청 중 국정원 비율이 99%

미래부는 지난 22일 2013년 상반기 감청 현황 등을 발표했다. 통계 추이(전화번호, ID 기준)를 보면 감청은 전년 동기 대비 8.1% 줄었고, 통신사실확인자료는 25.8% 감소했다. 다만 통신자료는 25.2% 증가했다.

감청이 줄어드는 이유는 검찰, 경찰 등 일반 수사기관의 감청 통계가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국정원 감청은 별로 줄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전체 감청 통계에서 국정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2000년 44.5%에서 2012년 97.4%까지 급증했다.

올해 상반기만 보면 국정원의 감청 편중현상이 더욱 심각해졌다. 통신사를 통해 이루어진 전체 감청 3540건 중 무려 3511건이 국정원에 의해 실시됐다. 이는 99.2%로 사상 최고 비율이다. 진보네트워크는 "국정원의 수사권이 오남용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

그런데 이 통계엔 휴대전화 감청이 포함되지 않았다. 국민 대부분이 이동통신을 통해 통화를 하는데 통신감청 통계엔 유선전화와 인터넷만 포함되어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휴대전화는 기술적으로 감청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손승현 통신정책기획과장은 “2G에선 가능했지만 3G, LTE(4G) 휴대전화는 기술적으로 감청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 NSA의 휴대전호 감청 논란과 '이석기 의원' 수사 내용만 보더라도 휴대전화 감청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휴대전화 통화가 포함되지 않은 이 감청 통계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진보네트워크는 "'이석기 수사'에서 공중전화와 휴대전화 감청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며 "그런데 정부의 공식적인 휴대전화 감청 수치는 여전히 0건이라는 사실 또한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부 감청 영장에 기재된 이동통신 문자메시지 감청조차 전혀 집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통계 마사지' 의혹이 제기되어 온 바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패킷감청 전문가인 오길영 신경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3G, 4G도 결국 기지국으로 연결되고 유선망을 통해서 통신을 한다”며 “기지국과 유선망에 패킷감청 장비를 연결하면 감청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 감청(통신제한)된 전화번호, ID 건수 추이 ⓒ진보네트워크
 
국정원 ‘직접 감청’은 없다?

한 해에 6000~9000개의 전화번호와 ID를 감청한다는 정부 통계는 통신사를 통한 '간접 감청'만 집계한다. 국정원 등 수사기관의 '직접 감청'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국정원은 '미림팀 불법 도청' 사건 이후 감청장비를 모두 파기했다고 밝혔지만, 정보인권단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진보네트워크는 "국정원, 경찰, 검찰, 군이 보유하는 감청 장비를 사용해 직접 감청을 하는 통계는 한 번도 알려진 바 없다"면서 "그 전체적인 현황을 파악한다면 감청이나 통신자료 제공 현황은 더 심각한 수준일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직접 감청’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반박했다. 국정원 관계자는 “국정원은 법원의 영장을 발급받아서 합법적으로 감청을 하고 있다”며 “국정원엔 원천적으로 감청장비가 없기 때문에 통신사를 통한 간접 감청만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감청 장비가 없다는 건 국회에도 모두 해명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기지국 수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통신사실확인이 너무 방대하게 이루어져 일반 이용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통신사들은 올 상반기 938만건의 전화번호와 ID를 수사기관에 제공했다. 대부분은 하나의 기지국에서 신호가 잡히는 모든 휴대전화번호를 쓸어가는 '기지국 수사'를 통해 걷어졌다.

박경신 고려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한해 3000만개가 넘는 전화번호와 ID가 수사를 위해 제공됐다”며 “인구 5000만명의 절반 이상이 피의자 신분으로 취급받는 건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 <국내 감청의 99%는 국정원 '공안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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