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대사관은 1890년(고종 27년) 정동 4번지에 준공됐다. 대한제국 시절 덕수궁을 확장하기 이전에 지어진 곳이다. 서울시는 영국대사관에 돌담길 ‘점유’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보도가 사실이면 한국 시민들은 지금껏 덕수궁의 아름다운 길의 일부를 부당하게 빼앗겨온 셈이 된다. 그런데, 해당 기사를 읽기 전에 들여다봐야 할 역사가 있다. 조선일보 기사에는 없는 내용이다.
1904년 경 경운궁(오늘날 덕수궁) 권역은 사적으로 지정된 현재의 덕수궁 권역만이 아니라 구 경기여고부지와 미 대사관 부지 등을 포함해 태평로와 신문로 사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중에는 임시 궁궐이었지만, 대한제국 시기에는 정치·외교의 중심지였다. 고종은 덕수궁을 통해 대한제국의 위엄을 살리고자 했다.
▲ 조선일보 9월 10일자 2면 기사. | ||
덕수궁은 1904년 석연찮은 대 화재를 겪은 뒤 일본이 ‘전면 매각’ 논의를 꺼내며 존립위기를 겪었다. 일본은 덕수궁이 경성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해 궁역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전면 매각을 통해 덕수궁 일대를 상가지역으로 만들고 경성부청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이에 고종은 1919년까지 덕수궁에 머물며 덕수궁을 지켜냈다.
그러나 고종 서거 이후인 1919년 겨울부터 흥덕전이 헐리며 덕수궁 해체 작업이 시작됐다. 고종의 1주기가 지나자 일본은 영성문 대궐을 처분했고, 1920년 2월에는 선원전 해체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1920년 4월에는 선원전 주변의 부지를 조선은행, 식산은행, 경성일보사에 매각했다. 경성일보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다. 그렇게 덕수궁은 규모가 축소되어 과거의 영광을 잃어갔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일본은 다시 경성 발전을 명목으로 덕수궁 매각 방침을 밝혔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7년 5월 10일자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전체를 매각하는 방침을 철회하는 대신 궁역 중 태평로에 근접한 구역 30간을 매각했다. 곧 덕수궁 구역에 많은 훼손이 가해졌다.
덕수궁 옛터와 오늘날 덕수궁을 비교할 수 있는 조감도. 붉은 색으로 그려진 공간들이 모두 덕수궁 옛터다. 검은 선으로 굵게 구획된 곳이 현재 덕수궁 터다. ⓒ문화재청 | ||
찢겨진 덕수궁 위에는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그 중 한 곳이 조선일보사다. 1912년 조선총독부는 도로 개수를 명목으로 덕수궁 부지 1,621평과 경선궁 택지 331평을 할애할 것을 요구했다. 오늘날 서울시 의회와 조선일보사는 경선궁이 있던 자리다. 경선궁은 엄비(영친왕의 어머니)를 위해 만든 궁이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일제에 의해 사라진 덕수궁 터에서 조선일보 기자들이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기자들이 옛 덕수궁 터에 자리 잡은 회사에 앉아 ‘덕수궁 무단점유’ 논란 기사를 쓰는 장면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문화유산이 훼손된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가 걷지 못하는 영국대사관 앞 덕수궁 돌담길 외에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덕수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