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질서를 유린한 국가정보원 정치개입 사건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내란음모’ 수사로 신문‧방송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전직 국가정보원장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해당 사건의 수사결과를 은폐‧조작한 혐의로 전직 서울경찰청장이 기소 당한 사건이 ‘이해당사자’인 국정원의 주도로 언론의 외면을 받고 있는 것이다.

KBS‧KBS‧MBC‧조중동 등 주요 언론은 지금껏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을 여야 간 공방으로 처리하거나 또는 검찰의 수사결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식으로 물타기에 나선 바 있다. 국정원 국정조사 기간 중에는 이를 중계하는 수준으로 다뤄왔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정황을 적극적으로 취재하지는 않았으나 국정원과 여당 논리를 빌어 검찰과 야당‧시민사회의 주장과 전국적인 시국선언에 대응하는 보도를 해왔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이석기 내란음모’ 수사로 이 같은 보도마저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에서 사라졌다. 국정원이 3년 전부터 내사해온 사건을 지금 시점에서 공개 전환한 배경에 대해 의문을 먼저 품기보다 국정원 ‘내란음모’ 프레임을 확산시키고 있다.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은 권은희 전 송파서 수사과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법정 공방 수준으로 사안이 축소됐다.

   
▲ 31일자 MBC '뉴스데스크' 보도.
 
당장 31일 뉴스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날 MBC <뉴스데스크> ‘내란음모’ 아이템은 <내란음모 통진당 3명 구속…“사안 중대, 증거인멸 우려”>, <통합진보당, 국정원 앞 집회…“내란 음모 철저한 조작”>, <방통위 이석기, 국방자료는 왜? KBS 출연 탈북자 명단도 요구>, <‘내란음모’ 녹취록 확보 경로는? 법적 효력 있을까>로 네 꼭지였다.

같은 날 KBS <뉴스9>에 등장한 ‘내란음모’ 아이템은 <내란음모 3명 구속…이석기 영장 발부 자신>, <구속된 3인은 누구?…공공기관 대표도 있어>, <통진당 대규모 항의 집회…체포동의안 논의>, <미묘하게 바뀐 이석기 의원 해명…이유는?>으로 네 꼭지였다. 공영방송 MBC와 KBS 모두 국정원 정치개입 아이템은 한 건도 없었다.

이석기 의원 측이 실제로 내란음모를 꾸몄다면 이 의원처럼 헌정질서를 유린한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 또한 마찬가지의 비중으로 지속 보도하는 것이 상식이다. 더욱이 내란음모사건의 경우 언론보도에서 나온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이는 시대에 뒤쳐진 주사파 130여명의 허무맹랑한 '모의'에 그친 것인 반면, 대선개입사건은 정보기관의 수장과 요원이 조직적으로 대통령 선거에 '개입'하여 국가운영에 위해를 가한 실제 '행위'사건이다.  

그러나 공영방송과 조중동 보수언론은 국정원 프레임에 맞춰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의 내란음모 혐의만을 주요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는 교묘한 국면전환이다. KBS는 31일 보도에서 “국정원에 체포됐던 통합진보당 관계자 3명이 내란 음모 혐의로는 33년 만에 구속되면서 수사가 탄력을 받고 있다. 검찰은 이석기 의원에 대한 영장 발부도 자신하고 있다”고 전하며 국정원의 수사 성과를 알렸다. 

MBC는 31일 보도에서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이었던 이 의원에게 국방부는 기밀을 제외한 일반 문서를 전달했다. 국회의원이 자기 상임위 소속이 아닌 부처에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있는 이 의원이 해당 자료를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명확치 않아 논란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며 논란을 자가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 31일자 TV조선 뉴스 화면.
 
종합편성채널은 이미 수사가 끝난 모양새다. TV조선은 31일 단독 보도라며 리포트를 내보냈다. TV조선은 “RO모임 녹취록에는 지난 4월 발생했던 미국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를 연구하자는 내용도 담겨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러시아 사이트를 통해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는 발언도 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TV조선은 “국정원이 확보한 RO모임 녹취록에는 이 압력밥솥 폭탄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분석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실생활에서 쉽게 폭탄을 제조하는 방법을 논의한 것이다. 러시아 인터넷 사이트를 이용하면 총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장난감 총을 개조하면 사람을 조준할 수 있다는 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채널A 역시 단독보도라며 “이석기 의원이 속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심판을 청구할 수 있는 지 정부가 검토해보기로 했다. 내란 음모가 명백히 드러날 경우라는 전제가 달리긴 했지만, 실제 심판이 청구되면 헌정 사상 최초가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사 내용을 보면 익명의 정부 관계자 멘트조차 없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 31일자 채널A 뉴스 화면.
 
조중동 등 보수언론은 방송보다  공격적으로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31일 동아일보는 <체제전복세력 금배지 달고 버젓이 활개치는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내보내며 “총선에서 야권연대는 적화세력에 금배지까지 달아줬다”, “권력을 잡기 위해 체제 전복 세력과 손잡았던 민주당은 여전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공안당국이 경기동부연합 지하조직 RO와 옛 소련의 비밀 첩보조직 KGB 전술의 유사성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이번 사건에 냉전반공이데올로기를 주입시켰다. 중앙일보는 “KGB에는 석유 공급 시설을 파괴하는 테러 전술이 있었다. RO 모임 녹취록에서도 물류‧유류 시설을 파괴하자는 내용이 포함돼있다”고 전한 뒤 공안당국 관계자 말을 인용해 “RO 조직원들 논의내용은 북한에 사상적 영향이 컸던 소련 KGB의 테러 전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유사시 대한민국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모의 성격이 짙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 <‘이석기 집단’의 대한민국 향한 敵愾心(적개심)과 북에 대한 충성심>이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과대망상적 극렬 좌파 적군파들이 일본 세계를 무대로 비행기 납치, 대중을 향한 기관총 세례, 좌파 내부 간 상호 살육을 저지른 전례가 이석기 집단의 정신병적 언동을 간단히 넘길 수 없게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우리사회를 적으로 보고 총기와 폭탄을 구해 기간 통신망과 유류저장소를 폭파하려고 사전 답사하는 행태는 이석기 집단의 정신 상태가 1970년대 광적 집단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이석기 집단은 단순한 정신병자의 집합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파괴하려는 공격집단이다”라고 주장했다.

   
▲ 조선일보 31일자 사설.
 
이 같은 보도는 이번 사건을 상대적으로 균형감 있고 종합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의 보도와 비교된다. 경향신문은 31일자 <급작스러운 공안정국 뒤에 김기춘 비서실장 그림자?> 기사에서 “검사 출신인 김기춘 실장은 유신시절인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중앙정보부 5국장(대공수사국장)을 지내며 숱한 공안수사를 이끌었다. 노태우 정권에선 검찰총장으로 발탁돼 취임 석달 뒤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으로 공안정국이 조성됐다”고 보도하며 이번 정국의 배경을 짚었다.

경향신문은 “정권이 고비에 몰릴 때마다 기획성 공안수사로 국면을 전환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김기춘은) 1991년 법무장관에 임명됐다”며 “그가 청와대 비서실장에 취임한 지 23일만에 진보당 사건이 터져나왔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로 보긴 어렵다는 게 야권의 시각”이라고 전했다.

한겨레신문은 31일자 3‧4면 커버스토리로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방해를 폭로한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을 심층취재하며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에 대해 전했다.

   
▲ 한겨레신문 1면 사진기사.
 
한겨레신문은 이어 31일 <황당무계하고 충격적인 ‘진보당 녹취록’>이란 제목의 사설에서 “녹취록에는 참석자들의 시대착오적인 현실인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관념적 과격성이란 말로도 부족한 황당무게한 사고방식도 엿보인다”며 “녹취록 내용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이 의원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의회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스스로를 진보로 부르는 것도 삼가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이들의 행태가 내란음모에 해당하는가 하는 법적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또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서 녹취록이 비정상적으로 공개되는 등 국정원의 여론몰이 구태가 되살아난 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강조했다.

이석기 의원 등 통진당 인사들 수사에 언론보도는 국정원의 의도와 무관하게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는 점에서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충분히 다뤄져야 한다. 공개된 녹취록이 사실이라면,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대중운동과 유리된 채 시대를 거꾸로 살면서 진보라 자처하는 '광신적 자위' 집단에 불과하다. 반면 진보당의 주장처럼 녹취록이 취지를 왜곡하고 날조된 것이라면, 정권유지를 위해 각종 공안사건을 조작했던 유신군사정권시대로 시대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렸다는 점에서 국정원의 조직해체를 비롯해 박근혜 정부가 그 책임을 명백히 져야 한다. 녹취록 등의 작성에 진보당 내 국정원의 협조자가 있었다는 진보당 이상규 의원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더라도, 모임에 참석한 인사들의 발언에 대한 진실 여부는 치열한 진실공방이 예상된다.  

그러나 KBS· MBC 등 공영방송과 조중동 보수언론처럼 대선개입사건의 당사자로서 3년간 묵혀왔던 사건을 대선개입사건으로 위기에 직면한 국정원과 박근혜 정부가 왜 하필 이 시점에 터뜨렸는지에 대한 정치적 배경과 의구심은 애써 외면한 채, 국정원의 일방적인 여론몰이에 편승해 일방적으로 여론을 몰아가려는 보도태도는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균형감을 상실한 극단적인 '정파적' 보도이다.  

불편부당한 언론인의 자세에서 사안의 중대함을 따져가며 국정원 정치개입사건에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현재 공안정국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도 주목하는 균형잡힌 보도가 있어야 한다. 특히 공영방송은 더욱 더 필요한 자세라 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 그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이같은 자세를 유지한다면 언론으로서 또한 언론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공영방송과 보수언론은 군사독재시절 부끄러웠던 자신들의 과거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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