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의 외부필진인 김성구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미디어오늘을 통해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란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연재된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자본을 읽다'의 필자인 강신준 교수가 김성구 교수의 비판글을 반박하는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을 미디어오늘에 보내와 게재하였습니다. 이후 강 교수의 반박글이 게재된 후 다시 김성구 교수가 반박에 대한 재반박글을 보내왔고 다시 강신준 교수가 재반박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 게재 했습니다. 이후 김성구 교수가 강 교수의 재반박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게재했고, 또 다시 강신준 교수가 김성구 교수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게재합니다. 다시 김성구 교수가 논쟁의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미디어오늘은 경제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며 전세계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인 맑스주의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두 노장 경제학자들 간의 논쟁을 통해 자본론 해석에 대한 학문적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두 경제학자의 논쟁을 지면을 통해 이어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논쟁 글 순서>
1.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2.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3.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4.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5. 쟁점은 수정주의·교조주의가 아니라 ‘자본’ 곡해 여부다
6. 김성구 교수와의 논쟁을 끝내면서

지난 글에서 논쟁을 끝내기 위해 내가 강신준 교수에게 제기한 5개 질문은 이러하였다.

1. 맑스가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해 <자본>을 발간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맑스의 문헌은 무엇인가?
2. 개혁과 변혁이 같은 말인가?
3. <자본> 제3권 제47장에서 맑스가 봉건제를 착취사회로 설명한 것이 틀린 것인가?
4.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만든 것이 맑스가 아니라 레닌과 볼셰비키인가?
5.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가 원조 맑스주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맑스의 문헌은 무엇인가?

강 교수는 이 논쟁의 마지막 글(“김성구 교수와의 논쟁을 끝내면서”)에서 많은 지면을 사용해 답변한다면서도 정작 위의 질문에 답한 것은 없다. 질문들을 둘씩 묶어서 답변한다는 방식으로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피해갔던 것이다. 강 교수가 답변을 못하는 것은 이 답변이 강 교수 자신의 왜곡과 날조를 인정하는 게 되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답을 못했지만, 논쟁을 따라온 분별있는 독자라면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답은 정말 간단하다.

1. 맑스가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해 <자본>을 발간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맑스의 문헌은 무엇인가? 문헌 확인 못함 또는 없음.
2. 개혁과 변혁이 같은 말인가? 다른 말임.
3. <자본> 제3권 제47장에서 맑스가 봉건제를 착취사회로 설명한 것이 틀린 것인가? 맑스의 설명이 맞음.
4.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만든 것이 맑스가 아니라 레닌과 볼셰비키인가? 아님. 맑스의 개념임.
5.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가 원조 맑스주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맑스의 문헌은 무엇인가? 문헌 확인 못함 또는 없음.

합리적이고 현명한 독자라면 이런 답이 의미하는 바도 분명할 것이다.
 
1. 맑스의 문헌적 근거도 없이 강 교수가 자의적으로 맑스의 <자본> 집필 동기가 자본주의를 개혁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이는 사실관계의 왜곡이자 날조라는 것.
2. 강 교수에 있어서는 경제학 개념만이 아니라 국어 개념 자체가 문제라는 것, 강 교수 맘대로 맑스의 변혁을 개혁으로 바꿔놓고 이게 맑스의 혁명사상이라고 날조했다는 것.
3. 강 교수가 봉건제를 착취가 없는 사회로 왜곡, 미화했다는 것, <자본>의 역자가 <자본>외의 다른 저작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의 내용조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강 교수의 <자본> 해설에 나타난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 ‘운명의 역전’은 <자본>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 안내판이라는 것.
4.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레닌이 만들었다는 강 교수의 주장은 한 마디로 어이없는 날조라는 것.
5. 노동운동사가 전공이라는 강 교수가 공산주의, 사민주의라는 기본 개념의 역사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수정주의·교조주의 딱지놀음이나 하고 있다는 것.

   
칼 맑스의 자본론
 
장문의 답변을 했다고 생각하는 강 교수로서는 위와 같은 평가가 매우 부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강 교수의 답변도 좀 존중해가면서 왜 이런 평가가 불가피한지 살펴보도록 하자.

1. 문헌적 근거에 대한 강 교수의 유일한 말이다:

먼저 긍정적 이해와 관련된 구절이다.(김 교수의 질문에 따르자면 개혁에 대한 문헌적 근거가 될 것이다) “감독과 지휘의 노동은 … 모든 결합적 생산방식에서는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는 생산적 노동이다.”(<자본> 3권, 503, 504쪽).
 
<자본>의 이 문구가 어떻게 맑스가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해 <자본>을 집필했다는 주장의 문헌적 근거가 되는가? 그렇다고 납득할 사람이 강 교수 말고 또 있을까 의문스럽다.

2. 강 교수는 개혁과 변혁이란 용어의 구별을 의식적으로 피한다고 한다.

사실 내가 이들 용어를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이유는 용어와 관련된 선입견(혹은 예단)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볼셰비키 이후 노선논쟁과 관련된 용어들이 “딱지붙이기”에 사용되면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얘기를 곧바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용어를 구별 않고 섞어 쓰는 게 마르크스의 얘기를 곧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그렇기는커녕 두 용어를 구별 않고 섞어 쓰면, 그게 바로 맑스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직행코스가 된다.

3. 강 교수는 노동지대에 대한 <자본>의 서술을 인용하면서도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강 교수의 말이다:

봉건제는 자급자족 체계가 거의 완벽하게 작동하던 초기 봉건제에서 교환이 점차 확대되는 후기 봉건제로 발전한다. 전자에는 지대가 노동지대였고 이 시기는 경제적 분석이 별로 필요없는 “투명한 생산관계”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여기에서는 잉여가치와 타인의 불불노동과의 일치가 전혀 분석될 필요가 없다”(3권, 1056쪽)고 말한다. 가난의 원인에 대한 경제구조의 분석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직접 맑스의 말을 들어보면,

가장 단순한 시초의 지대형태인 노동지대에 관한 한 다음과 같은 것만은 분명하다. 즉 지대가 잉여가치의 시초형태이고 잉여가치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잉여가치가 타인의 불불노동과 일치한다는 것은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일치는 눈에 보이는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인데, 직접적 생산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하는 노동은 그가 영주를 위해 행하는 노동과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분리되어 있고, 후자의 노동은 제3자를 위한 강제노동이라는 강인한 형태로 직접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본론>III(하), 김수행 역, 제1 개역판, 961-962쪽.

맑스는 노동지대가 잉여가치 전체이고, 타인의 불불노동 즉 노동력 착취라는 것을 명시하면서, 이에 대한 특별한 분석이 필요 없는 이유는 누구 눈에도 영주를 위한 직접적 생산자 즉 농노의 노동이 영주를 위한 강제노동이라는 점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자본> 제3권에서는 봉건제의 전형적 형태에서 노동지대를 통한 영주의 농노 착취가 의문의 여지없이 서술되어있다. 명색이 <자본> 역자인 강 교수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노동지대에서는 잉여가치가 타인의 불불노동과 일치한다는 것을 분석할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가난의 원인에 대한 경제구조의 분석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라고, 즉 봉건제는 착취가 없는 자급자족경제이기 때문이라고. 강 교수는 이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가 강 교수의 이해력을 문제 삼는 것은 이렇게 정말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4. 강 교수는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에 관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헌의회를 해산한 볼셰비키의 독재가 마르크스의 이 구절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지 나는 궁금하기만 하다.

   
칼 맑스
 
이전 글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레닌이 만든 거라고 하더니만, 이제는 레닌의 개념과 맑스의 개념이 어떻게 같은 거냐고 반문하고 있다. 이전에 말한 것을 잘못이라고 정정하는 것 없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어투다. 내가 단순 명확한 형태로 이 개념을 만든 게 누구냐고 답을 요구했는데도 말이다. 좋게 해석한다면, 강 교수는 이전 글에서 레닌이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차용해서 왜곡했다는 취지로 쓴 모양이다. 그런데 개념의 차용과 왜곡이라는 취지를 개념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쓰는 사람이 강 교수 말고 누가 또 있겠는가? 더군다나 대학교수가 말이다.

5. 사민주의가 원래 맑스주의라는 자신의 주장에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 없이 강 교수는 이를 반박하고 있는 엥겔스의 서술에서 딱지가 아니라 내용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엥겔스가 사민주의 딱지를 반대한 게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화화라는 내용을 갖지 않고 사민주의 딱지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이 사민주의가 원래 맑스주의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맑스와 엥겔스는 1860년대에 그리고 1870년대 중반까지도 이른바 사민주의자는 맑스주의적 내용을 갖고 있지 않다고 명백하게 비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 교수는 엥겔스로부터의 이 인용문을 거론하면서 내가 엥겔스의 말을 끝까지 읽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한다고 비판까지 덧붙인다. 내가 읽고서 가져온 인용문을 가지고 말이다. 글을 제대로 안 읽어봤다든지 또는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이런 식의 비난은 이제까지의 강 교수의 글들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모두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남한테 뒤집어씌울 때 쓰는 말이라는 것을 독자들도 이제는 이해할 것이다. 강 교수의 다음의 말도 엥겔스의 말을 끝까지 읽고서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다.

이후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조직은 거의 대부분이 사민당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볼셰비키 자신이 만든 조직의 이름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다. 볼셰비키는 1898년에 이 정당을 창당하는데 그것은 김 교수가 인용한 1895년 엥겔스의 글 이후이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엥겔스까지 그렇게 반대하는 사민주의라는 딱지를 이들은 왜 처음부터 자신들의 이마에 붙였던 것일까?

엥겔스로부터의 짧은 인용문이 강 교수에게는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인가? 다시 옮겨놓고 보자. 엥겔스의 이 글은 1894년에 쓴 것이다.

이 모든 글[1871-75년 사이 <인민국가>에 발표된 논문들]에서, 특히 마지막 글에서 내가 항상 나 자신을 사민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명명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인지할 것이다. 이는 당시 여러 국가들에서, 사회를 통한 전체 생산수단의 인수를 결코 자신의 깃발에 써놓지 않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민주의자라고 명명했기 때문이었다. ... 독일에서는 라쌀레 추종자들이 스스로를 사민주의자라고 불렀다. ... 따라서 맑스와 나로서는 우리의 특별한 관점을 특징짓기 위해 그런 분명치 못한 표현을 결코 선택할 수 없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1870년대 중반까지도 사민주의라는 명칭에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그건 이 명칭이 맑스주의의 원칙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오늘날은 상황이 다르다. 그 경제 강령이 단지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적일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공산주의적이고, 또 국가 전체의 극복, 따라서 또한 민주주의의 극복이 그 정치적 최종 목표인 당에 이 용어[사민주의]가 어울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용어는 그만 좋다고 하자. 당은 발전하고 있는데, 명칭은 그대로 남아있다.

여전히 명칭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제는 이 명칭을 더 이상 문제삼지 말자고 엥겔스는 말한다. 이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사민당이 맑스주의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당이 맑스주의의 내용을 담은 것은 1875년 라쌀레 당과 아이제나하 당의 통합과 그 하에서 맑스주의의 원칙이 관철되면서부터다. 맑스와 엥겔스가 그 시점 이래 당의 명칭을 받아들이게 되었음을 1894년의 시점의 엥겔스의 말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각국에서 그리고 제2인터내셔널과 함께 사민당의 당명은 보편화되고 확산되었으며, 러시아에서도 맑스주의자들이 사민당(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명확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강 교수는 반문한다. “볼셰비키는 1898년에 이 정당을 창당하는데 그것은 김 교수가 인용한 1895년 엥겔스의 글 이후이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엥겔스까지 그렇게 반대하는 사민주의라는 딱지를 이들은 왜 처음부터 자신들의 이마에 붙였던 것일까?” 1895년 이후 시점은, 아니 그것보다 더 앞선 시점부터 엥겔스는 이 명칭을 문제삼지 않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도 강 교수의 이해력 부족이 문제의 근원이다.
      
이상 강 교수와의 논쟁은 다시 말하거니와 맑스의 이론에 대한 해석의 문제, 해석의 차이에 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문제는 사실관계의 여하, 왜곡과 날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맑스가 무덤에 있고 우리는 맑스가 아니니까 맑스의 이론에 대해 이런 저런 해석의 차이가 있더라도 맑스 이외에는 누구도 사실 여하를 확인할 수 없다면서 함부로 날조라는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러나 위의 5개 질문 어떤 것도 맑스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맑스와 엥겔스의 문헌을 통해서 사실 여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관계의 확인을 통해 강 교수의 주장은 모두 맑스에 대한 왜곡이고 날조라는 것도 밝혀졌던 것이다. 내가 강 교수에 대해 ‘날조’라는 비판을 하는 게 강 교수에게는 학자간 논쟁의 금도를 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날조라는 말을 사전적 의미로만 사용했을 뿐이다. 강 교수의 인격을 폄하하거나 문제삼는 건 전혀 내 의도가 아니다. 날조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거짓으로 꾸민다’는 것이다. 강 교수가 맑스를 왜곡하고, 맑스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처럼, 또 말한 것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 주장하는데, 여기에 대해 날조라는 말 외에 어떤 말이 더 정확하겠는가? 강 교수는 통상적인 용어사용과는 전혀 맞지 않는 자신의 이상한 용어사용법에 대한 비판은 그냥 묵살하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의 정확한 용어사용법을 문제삼고 나서는 것이다. 내가 강 교수의 이해력이 중학교 수준이라고 말한 것도 똑 같은 맥락이다. 이건 논쟁의 품위를 훼손하는 것도 아니고, 강 교수의 인격을 모독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다만 문제가 되었던 문장에 대한 강 교수의 이해력이 객관적으로 그 수준이라는 것을 지적했던 것뿐이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었다면, 강 교수에게도 독자들에게도 이해를 구하고 싶다.     

강 교수가 제기한 그 밖의 문제들, 예컨대 실천적인 전술문제라든지 볼셰비키와 현실사회주의의 문제 등은 이 논쟁의 원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들이고, 다분히 주 쟁점을 왜곡하고 희석시킬 우려가 있어 나도 그냥 묵살하였다. 다만 앞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내 글 하나를 참조시켰을 뿐이다. 강 교수는 내가 볼셰비키의 관점과 어떤 관계냐, 내 이론적, 정치적 정체가 뭐냐, 현실사회주의의 실패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 이런 걸 자꾸 추궁하는데, 이런 건 위의 질문들에 답변하는 것과 아무 상관없는 것들이다. 강 교수는 정작 위의 질문들에는 답하는 것 없이 상관없는 문제들을 들고 나왔을 뿐이다.

강 교수가 학자로서, 교수로서 <자본>을 어떻게 자의적으로 해석, 왜곡하면서 어떤 책을 쓰든 논문을 쓰든 사실 난 별로 관심이 없다. 어차피 연구자 세계, 그것도 맑스주의 연구자의 세계는 범위가 제한되어있고, 또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어쨌든 전문적인 연구를 토대로 강 교수의 주장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문을 통한 대중적인 강의라면 사정이 다르다. 경향신문 같은 중앙일간지에서의 <자본> 연재는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본>의 왜곡과 날조는 정화되지 않고 그대로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마련이다. 이는 맑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거나 토론을 활성화하기는커녕 맑스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가로막고 왜곡하는 독소로서 작용할 것이다.
내가 강 교수의 <자본> 해설을 문제삼고 나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이 논쟁에서 경향신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경향신문으로서는 지면만 제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설의 책임은 강 교수가 지는 것이다. 이 점은 나도 분명히 하고 싶고, 그래서 “경향신문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라는 제목으로 쓴 ‘바심마당’의 원래 글 제목도 온라인 판에서는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로 변경해달라고 미디어오늘에 요청했던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