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의 외부필진인 김성구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미디어오늘을 통해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란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연재된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자본을 읽다'의 필자인 강신준 교수가 김성구 교수의 비판글을 반박하는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을 미디어오늘에 보내와 게재하였습니다. 이후 강 교수의 반박글이 게재된 후 다시 김성구 교수가 반박에 대한 재반박글을 보내왔고 다시 강신준 교수가 재반박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 게재 했습니다. 이후 김성구 교수가 강 교수의 재반박글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게재했고, 또 다시 강신준 교수가 김성구 교수에 대한 반론을 보내와 게재합니다.

미디어오늘은 경제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며 전세계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인 맑스주의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두 노장 경제학자들 간의 논쟁을 통해 자본론 해석에 대한 학문적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두 경제학자의 논쟁을 지면을 통해 이어가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논쟁 글 순서>
1.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2.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3. 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4.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답글
5. 쟁점은 수정주의·교조주의가 아니라 ‘자본’ 곡해 여부다

이제 김 교수가 나의 <오늘 자본을 읽다> 연재에 대해 “수정주의적”이라는 비판을 제기하면서 시작된 이 글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난번 글에서 나는 독자들을 위해 보다 생산적 논쟁을 위한 내용을 제안했으나 김 교수께서 거부의 의사를 밝혀 왔기 때문이다. 사실 김 교수와의 글은 이제 밑천이 거의 드러난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다. 독자들을 위해 우리 두 사람의 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해보고자 한다.

1. 김 교수의 질문에 대하여

김 교수는 친절하게(!) 글의 말미에 자신이 묻고 싶은 사항을 요약해두었다. 우선 이들 질문에 대한 답글을 드리고자 한다. 독자들을 위하여 김 교수의 질문을 답변의 내용에 맞추어 나누어 보았다. 질문은 모두 5가지이다.

1. 맑스가 자본주의의 개혁을 위해 <자본>을 발간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는 맑스의 문헌은 무엇인가?
2. 개혁과 변혁이 같은 말인가?

아무래도 김 교수는 변혁과 개혁이라는 용어에 신경이 집중되는 모양이다. 사실 내가 이들 용어를 의식적으로 구별하지 않는 이유는 용어와 관련된 선입견(혹은 예단)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볼셰비키 이후 노선논쟁과 관련된 용어들이 “딱지붙이기”에 사용되면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얘기를 곧바로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김 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엥겔스의 1895년 글에서 엥겔스가 사민주의 단어에 거부감을 표현한 것(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답변은 뒤에서 말하겠다)도 바로 이런 문제와 관련이 있다.

   
칼 맑스의 자본론
 
어쨌든 용어의 문제는 뒤에서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김 교수의 질문의 핵심을 추측해본다면 내가 말하는 “긍정적 이해”와 김 교수가 말하는 “부정”은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연속되느냐 단절되느냐의 문제일 것으로 이해된다. 김 교수는 앞서의 글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강 교수는 에필로그에서 자본주의 이후 사회가 소유의 사회화와 개인적 소유의 결합 위에 입각해 있다고 하지만, 변증법과 유물론을 말하는 어디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의 폐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긍정과 존속, 성숙만이 강조되어있다.(<강신준 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8월 3일자)

그런데 김 교수는 내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모양이다. 정말 내가 그렇게 부정의 측면은 얘기하지도 않고 긍정적 이해만을 강조했는가? 나는 자본주의의 연속과 단절의 두 측면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 변증법의 사고방식이라는 점을 내 글의 곳곳에서 얘기하고 있다. 몇 군데만 인용해 드리겠다. 먼저 긍정적 이해와 관련된 구절이다.(김 교수의 질문에 따르자면 개혁에 대한 문헌적 근거가 될 것이다)

감독과 지휘의 노동은 … 모든 결합적 생산방식에서는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는 생산적 노동이다.(<자본> 3권, 503, 504쪽)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도 경영자의 기능은 그대로 남는다는 것이다. 볼셰비키와 크메르루주가 이들 경영자를 “타도”해 버림으로써 빚어진 폐해는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자본주의 이후 사회는 자본주의가 이룩한 것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건설된다는 것이 맑스의 명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맑스는 이런 얘기도 하고 있다.
 
이 부정(자본주의의 부정을 가리킨다—강신준)은 자본주의의 획득물[즉 협업과 토지공유 및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되는 생산수단의 공유]을 … 기초로 하는 개인적 소유를 만들어낸다.(<자본> 1권, 1022쪽)

그러나 물론 자본주의가 이룩한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부정”을 거쳐 질적으로 변화된 형태로 남는 것이다. 변증법적 지양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내 연재 곳곳에서 그것들을 얘기하고 있다.(김 교수의 질문에 따르자면 변혁에 대한 내 얘기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바로 이 자본의 사회적 관계를 극복한다는 의미입니다. … 따라서 이 관계는 노동자가 스스로 이 관계를 끝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 노동자가 타인을 위한 노동을 멈추는 것,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미래를 여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운동이 자신의 이런 과제를 인식하고 직접 주도하지 않는 한 노동의 해방은 물론 자본주의의 미래도 없습니다.(연재(18) 본원적 축적)

이것은 우리들에게 <자본>의 이정표에 해당하는 물음, 즉 사회변혁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노동자의 여가시간을 타인을 위한 노동시간으로 바꾼 생산관계에 있습니다.(연재(29) 삼위일체정식)

나는 이처럼 사회변혁의 목표가 사회적 관계, 즉 생산관계의 변혁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물론 그 변혁의 구체적인 방법과 내용에 대해서도 노동운동의 주체적 실천과 관련하여 밝히고 있다. 그런데 김 교수는 내가 이런 부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는 것처럼 얘기한다. 애초 나는 두 번째 연재에서 내 얘기의 길잡이가 혁명의 동력과 혁명의 실패원인이라는 점을 밝혔는데 그 혁명이 자본주의의 부정이 아니면 무엇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일까? <자본>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얘기하는 책이란 것은 누구나 이미 아는 얘기가 아닌가? 그런데 <자본>을 얘기하는 사람이 자본주의의 “부정”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김 교수는 어떻게 하게 된 것일까? 지난 글에서도 여러 번 지적했듯이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얘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론에만 조바심을 내는 성향 때문이고 내가 우리 노동운동에서 발견한 전술적 문제점이 바로 이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나는 <자본>의 해설에서 “긍정적 이해” 부분을 독자들이 놓치지 않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올바로 보아야만 그것을 뛰어넘을 “부정적 대안”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김 교수의 세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3. <자본> 제3권 제47장에서 맑스가 봉건제를 착취사회로 설명한 것이 틀린 것인가?

김 교수는 <자본>의 이 부분에서 여전히 “자신이 보고 싶은 부분만”을 본 것 같다. 첫 번째 답글에서 이미 설명했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바로 제3권 47장에 있는 부분으로 답을 드리고자 한다. 봉건제는 자급자족 체계가 거의 완벽하게 작동하던 초기 봉건제에서 교환이 점차 확대되는 후기 봉건제로 발전한다. 전자에는 지대가 노동지대였고 이 시기는 경제적 분석이 별로 필요없는 “투명한 생산관계”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여기에서는 잉여가치와 타인의 불불노동과의 일치가 전혀 분석될 필요가 없다”(3권, 1056쪽)고 말한다. 가난의 원인에 대한 경제구조의 분석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봉건제가 후기로 접어들면 교환이 점차 확대되면서 영주는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해 노동지대를 생산물지대로 바꾸고(직영지와 농민보유지의 생산성의 격차 때문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화폐지대로 바꾸는데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상태가 나타나게 된다.

이런 지대형태에서는 잉여노동을 나타내는 생산물지대가 농민가족의 초과노동 전체를 꼭 탈취한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생산자에게는 초과노동 시간 중에서 그 생산물을 자신에게 귀속시킬 수 있는 노동시간을 벌 수 있는 여지가 노동지대의 경우에 비해 더 많아진다.(3권, 1061쪽) … 이런 농민들은 약간의 자산을 모아서 스스로 미래의 자본가로 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점차 늘어났다.(3권, 1065쪽)

   
칼 맑스
 
이것이 봉건제 후기 부농의 발생과정에 대한 마르크스 자신의 서술이다. 이것은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공동체 단위에서 작동하던 것이 드디어 개인적 단위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을 알려준다. 이들 부농의 등장을 농부 자신들의 노동 이외에 다른 무슨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자급적 구조 하에서 자신의 생산물을 자신이 직접 취득하는 상태가 아니면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어디에 있겠는가? 마르크스는 다른 곳에서도 이런 자급적 생산구조를 “개인의 자기 노동에 기초한 분산적인 사적 소유”(제1권, 1022쪽)(화폐지대 단계가 되면 농민은 자가잉여를 영주에게 지불하고 해방농노가 되고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자가 된다), 혹은 “열심히 자력으로 일해서 얻고 벌어들인 소유권 … 부르주아 소유권에 선행했던 소시민적, 소농민적 소유권”(<공산당 선언> Ⅱ.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모두 자신의 노동과 생산물의 소유가 일치하는 자급적 생산구조, 즉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통용되는 구조를 가리키는 말이다. 똑같은 곳에서 김 교수에게 이것이 왜 보이지 않는지 참으로 안타깝다.

김 교수의 마지막 두 질문은 이제부터 내가 따로 답해야 할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김 교수께서 사용한 딱지에 대한 나의 두 번째 답글과 관련된 것인데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4.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만든 것이 맑스가 아니라 레닌과 볼셰비키인가?
5. 공산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가 원조 맑스주의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맑스의 문헌은 무엇인가.

2. 사민주의 딱지의 문제에 대하여

나는 두 번째 답글에서 개량주의, 수정주의, 사민주의 딱지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고 이들이 제각기 구분된다고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런데 김 교수는 이들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아무런 추가적인 설명도 없이 ‘무조건(?) 수정주의, 개량주의, 사민주의는 하나의 동일한 정치적 조류인 것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내가 분명히 이들 노선논쟁의 역사적 근거를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는 왜 이것들을 동일한 조류라고 부르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김 교수가 이것들을 노선 논쟁의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딱지로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볼셰비키가 이들 딱지를 구분 없이 마구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 딱지가 사민주의 딱지를 기점으로 사용되었고 그 딱지는 민주주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볼셰비키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들 문제는 결국 사민주의 딱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런 나의 지적에 대하여 김 교수께서는 1895년 엥겔스의 글을 인용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미 사민주의와는 선을 긋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 교수가 인용한 글을 조금씩 나누어 보도록 하자. 그가 인용한 엥겔스 글의 첫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모든 글(1871~1875년 사이 <인민국가>에 발표된 논문들)에서, 특히 마지막 글에서 내가 항상 나 자신을 사민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로 명명하고 있음을 사람들은 인지할 것이다.

김 교수는 아마 이 구절을 보고 엥겔스가 사민주의에 비판적이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이는 당시 여러 국가들에서, 사회를 통한 전체 생산수단의 인수를 결코 자신의 깃발에 써놓지 않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민주의자라고 명명했기 때문이었다. (…) 독일에서는 라쌀레 추종자들이 스스로를 사민주의자라고 불렀다. (…) 따라서 맑스와 나로서는 우리의 특별한 관점을 특징짓기 위해 그런 분명치 못한 표현을 결코 선택할 수 없었다.

인용구에서 밑줄은 내가 그은 것이다. 이것은 엥겔스가 자신이 사민주의자가 아니라고 한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김 교수가 결론에만 조바심을 내면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경향을 우려하여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는 우스갯말을 충고로 드렸는데 김 교수는 한국말뿐만 아니라 엥겔스의 말도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라는 교훈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몸소 이런 수고를 하신 모양이다.

이 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엥겔스는 단순히 사민주의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사민주의라는 깃발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 글에서 “내용”은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던 “딱지”만 보고 엥겔스가 사민주의 딱지에 찬성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딱지는 볼셰비키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엥겔스와는 무관하다) 김 교수가 지난번 내 글을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서 읽어 보았으면 이런 착각은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김 교수의 착각을 일깨워드리기 위해 지난번 내 글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린다.

1869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이었던 독일의 아이제나허 분파의 명칭이 사회민주노동당이었고 이후 마르크스를 따르던 조직은 모두 이 명칭을 뒤따랐다. … 볼셰비키 자신이 속해있던 정치조직의 명칭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강신준의 두 번째 답글)

당장 내가 쓴 글과 엥겔스의 글 사이에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는가? 1869년에 창립한 독일의 아이제나허 분파는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조직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설립과정에 깊숙하게 개입하였던 조직이다. 그런데 이 조직의 공식명칭이 Sozialdemokratische Arbeiterpartei(SDAP 사회민주노동당)였다. 김 교수는 사민당의 명칭이 1875년 고타대회의 명칭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마지못해 받아들였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사실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1869년 조직은 라살레 분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노동조직(ADAV 전국독일노동자연맹)으로부터 마르크스를 따르기 위해 분리된 조직이라서 그들이 그 명칭을 “마지못해”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후 제2인터내셔널에서도 드러나듯이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노동자조직은 거의 대부분이 사민당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볼셰비키 자신이 만든 조직의 이름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다. 볼셰비키는 1898년에 이 정당을 창당하는데 그것은 김 교수가 인용한 1895년 엥겔스의 글 이후이다. 그러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엥겔스까지 그렇게 반대하는 사민주의라는 딱지를 이들은 왜 처음부터 자신들의 이마에 붙였던 것일까?

   
레닌과 볼셰비키 혁명.
 
1869년 이후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런던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끊임없는 교류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만일 김 교수가 생각한 것처럼 엥겔스가 정말 사민주의 자체를 반대하였다면 엥겔스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 아닌가? 최초로 자신들이 직접 개입한 조직의 이름을 사민당으로 용인하고 이후 자신들의 자문을 받는 모든 조직들의 이름을 사민당으로 용인한 까닭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지난번 내가 소개한 노선논쟁의 배경에 있다. 노동운동이 합법화되고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발생한 문제인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아이제나허 분파는 1875년 고타에서 자신들이 원래 떨어져 나왔던 라살레분파(이 분파는 위의 ADAV 명칭에서 보듯이 원래 사민주의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와 다시 통합하여 독일사민당을 설립하였다. 당연히 마르크스 엥겔스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도 사민당의 깃발 아래로 들어왔다. 라살레 자신도 마르크스를 함부로 인용하다가 마르크스가 자신을 오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마르크스가 “나는 마르크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던 얘기와 <자본> 안에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까닭도 모두 엥겔스가 경계했던 바 “자신들의 특별한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용어에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두 마르크스가 대중화되면서 발생한 문제이며 대중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실 엥겔스의 이 글은 사민주의 딱지를 옹호하는 글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딱지를 함부로 쓰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생산의 사회화라는 “사민주의의 내용”은 모른 채로 함부로 “사민주의”라는 명칭을 쓰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김 교수는 자신의 결론에만 조바심을 내면서 엥겔스의 글을 “끝까지” 읽어보지 않은 채 거두절미해버렸던 것이다. 김 교수의 착각을 일깨워 드리기 위해 조금 더 부연설명을 드리면 김 교수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일 사민당은 1959년에야 “생산의 사회화” 구절을 자신의 강령에서 제외시킨다. 그 이전까지는 이 구절을 강령에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즉 독일 사민당은 엥겔스가 비판하던 사민주의자들과는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은 스웨덴이나 여타의 다른 사민당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볼셰비키와 대립과 냉전이 격화되기 전 이들 사민당은 모두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강령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따라서 엥겔스가 비판하던 사민주의와는 무관한 사민당들이었다. 엥겔스가 위의 글에서 문제로 삼은 것이 사민주의가 아니라 “생산의 사회화”라는 사민주의의 “내용”이었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사민주의 딱지로 둔갑시킨 것은 물론 볼셰비키들이었고 김 교수는 이들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글에서도 말했지만 사민주의라는 딱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살던 시기에는 없던 것이며 볼셰비키가 나중에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그래서 김 교수가 정작 처음부터 의문을 가졌어야 할 부분은 내가 위에서 지적했듯이 도대체 볼셰비키는 나중에 자신들이 그렇게 반대한 사민주의라는 이름을 왜 처음부터 자신들의 이마에 스스로 붙였을까 하는 점이다. 결국 김 교수는 한국말뿐만 아니라 “엥겔스의 글도(사실은 마르크스의 글과 마르크스에 대한 나의 해석도 포함시키고 싶다) 끝까지 읽어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반면교사를 통해 몸소 남겨 주었다.

한편 4번의 질문은 아직 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건 강 교수가 논쟁을 하자는 게 아니라 논쟁의 먹잇감이 되겠다고 자청하며 달려드는 거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맑스의 국가론의 핵심적 부분이고 자본주의로부터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의 국가형태를 말한다. 맑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도 혁명적 독재의 과제를 선언하였고, 특히 프랑스 혁명에 관한 3부작 저작에서 이 개념을 구체적으로 발전시켰으며, 1875년 <고타강령 비판>에서 다음처럼 명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김 교수께서는 별로 길지도 않은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 구절은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는 앞에서 노동자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지배계급으로 승격시키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임을 이미 보았다. … 모든 생산이 연합된 개인들의 수중에 집중된다면 …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 한 계급으로서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지배권도 폐지할 것이다.(<공산당 선언 새로 읽기> 박영호 옮김: 172, 174쪽)

인용구에서 밑줄은 내가 그은 것이다.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구성된 제헌의회를 해산한 볼셰비키의 독재가 마르크스의 이 구절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지 나는 궁금하기만 하다. 물론 깊이 논의하면 매우 복잡해지긴 하겠지만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민주주의와 독재는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민주적인 선거를 했는데(더구나 볼셰비키 스스로가 주도한 선거였다) 선거결과를 무시했다면 그것을 독재라는 말 이외에 무엇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둘을 어떻게 같은 것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가 생각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개인의 독재가 아니라 계급의 독재를 표현한 것으로 … 통치형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잡았을 때 어디서나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상태를 가리킨다.”(<프롤레리아 독재>, 강신준 옮김, 56쪽)(밑줄은 강신준)

라고 카우츠키는 볼셰비키들에게 얘기해주고 있다. 물론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으므로 김 교수가 같은 구절을 다르게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단지 주의해야 할 점은 그것이 사물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미리 인식하는 일이다. 결론에 조바심을 내면서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글 가운데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발견하였다고 해서 곧바로 결론을 이끌어낼 것이 아니라 전체 그림을 보면서 맥락을 차분히 이해하는 것이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에 간절하게 기대하였던 과학적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상으로 김 교수께서 친절하게 요약해서 정리한 질문들에는 모두 답변을 한 것 같다. 혹시 독자들께서 조금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지면을 키울 수 없어 필요한 핵심부분만을 얘기한 것이니 이해를 구한다.

3. 생산적 논쟁을 위한 제안과 관련하여

나는 두 번째 답글에서 김 교수에게 두 가지 제안을 드렸다. 하나는 딱지에 대한 김 교수의 취향을 변호하려면 그 딱지의 원조인 볼셰비키와 김 교수의 관련을 밝혀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김 교수는 여기에 대해 매우 애매한 답변을 하고 있다. 김 교수는 먼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상대를 사민주의라고 비판하는 자는 강 교수에 따르면 볼셰비키가 되고 나도 볼셰비키가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사민주의 쟁점을 빙자해서 볼셰비키라는 딱지로 딱지 붙이기 놀음을 하고 있는 것은 강 교수 자신이 아닌가?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고 느꼈다면 김 교수는 볼셰비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논의하면서 김 교수가 문헌적 근거로 엥겔스를 인용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둘러싼 카우츠키와 레닌의 논쟁에서 레닌의 견해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을 보면 다시 그가 볼셰비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김 교수는 어디에서도 볼셰비키, 혹은 레닌에 대한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논쟁은 볼셰비키와 카우츠키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고 이 논쟁에서 나는 카우츠키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비판을 하려면 당연히 김 교수는 일찍이 그 논쟁의 반대편에 섰던 볼셰비키의 입장과 자신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 맞지 않을까? 스스로 볼셰비키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 막상은 볼셰비키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떳떳하지 못한 일이 아닐까?

그런데 혹시 다음 기회에라도 마음이 바뀌어 볼셰비키와의 관계를 밝힐 생각이라면 논쟁의 핵심쟁점이 민주주의 문제라는 점을 잊지 말도록 상기시켜 드리고자 한다. 볼셰비키에 동조한다면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독재를 지지한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이 논쟁에서 일관되었던 볼셰비키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 가지 덧붙인다면 볼셰비키가 의회를 해산했을 때 당시 마르크스주의 진영의 모든 정파의 대표들은 볼셰비키가 마르크스를 배반했다는 점을 적시하였다. 우파의 베른슈타인, 중앙파의 카우츠키, 좌파의 로자 룩셈부르크가 바로 그들이다. 당시의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는 독재를 마르크스의 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 외에 나는 논쟁의 생산적 성과를 위해, 그리고 김 교수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해 주기 위해 김 교수께서 “부정”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현재 유효한 실천적 수단을 좀 소개해달라고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 나는 내가 “긍정적 이해”를 강조하는 배경을 먼저 설명해 주었다. 이에 대한 김 교수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강 교수가 단순한 부정과 긍정적 이해가 결합된 입체적(?) 전술이라며 자부심을 갖고 제출하는 과제를 보면, 임금체계, 월급제, 산별노조의 교섭정책, 주간연속2교대제 등이다. 이 투쟁과제들은 모두 개혁투쟁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의 변혁과는 관계없는 것이다. … 그러면 실천 영역에서의 내 전술은 뭐냐며 정체를 밝히라고 강 교수는 몰아세우는데, 이런 문제까지 논의할 지면도, 시간도 나에게는 없다.

밑줄은 내가 그은 것인데 그는 사실상 답변을 거부한 셈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글속에서 그는 현장의 실천적 과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밝혀주고 있다. 내가 말한 실천적 과제들이 “모두 개혁투쟁에 속하는 것”이고 “변혁과는 관계없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변혁에 치중하는 김 교수께서는 이런 과제들에 관심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마르크스 해석에 대한 김 교수와 나의 견해 차이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듯하다. 김 교수에게서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새로운 실천적 전술을 기대한 나의 희망은 아마도 성과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김 교수와 주고받는 글에서 생산적 성과가 나왔으면 하는 기대도 무망해진 것 같다.

그래서 독자들을 위해 김 교수와 나의 견해차이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드리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원래 학술적 관점에서 <자본>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자본> 번역에 개입하게 되었던 내가 어찌하여 김 교수로부터 근거없는 딱지의 비판까지 받는 처지가 되었을까? 모든 것은 위에서 언급한 임금체계에서 시작되었다. 1990년대 초 우리 노동현장에는 신경영전략이 도입되었고 그것은 임금체계를 이용한 것이었다. 개별 노동자에게 평가를 통해서 별도의 임금을 더 얹어주는 자본의 전략이었다.(대우조선의 경우 호봉을 한 개 더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평가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노동자들의 단결을 와해시킬 목적이었는데, 문제는 노동자들도 다른 노동자들보다 자신이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싶어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민주노조들이 속절없이 와해되었다. 조합원들이 직접 파업을 결의하고도 평가를 빌미로 한 관리자들의 회유 전화에 파업에 참가하는 노동자가 하나도 없는 사태가 발생하였다.(대우조선의 사례) 포항제철 노조가 설립된 후 곧바로 해체되었고 골리앗파업으로 우리나라 민주노조운동을 견인했던 현대중공업 노조가 민주노총에서 탈퇴하였으며 다른 많은 사업장들에서도 노조 집행부가 크게 위축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어떤 대응이 필요했을까? 새로운 임금체계 반대투쟁을 해야 했을까? 그러나 노동자들이 오히려 이 임금체계를 더 선호하였다. 따라서 실질적인 방법은 자본가의 전술을 역이용하여 평가에 의한 임금차별을 받아들이되 평가를 교섭의 의제로 삼는 일이었다. 개별적 이해를 집단적 이해로 뒤집는 것으로 소위 “임금체계 협약”을 체결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독일의 금속노조는 이 전략을 이용하여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성공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전술에는 입체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자본이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려는 전술 속에서 노동자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선언>의 다음 구절이 절실하게 떠오른 상황이었다. “부르주아 계급 스스로가 … 자신과 맞서 싸울 무기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넘겨준 것이다.”(<공산당 선언> 앞의 책, 153쪽)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토대를 둔 임금체계였고 그것은 동시에 계급단결의 범위를 확장하여 산별노조와 산별교섭을 위한 토대로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임금체계는 금속연맹에서 적극적인 호응을 받긴 했으나 그것이 만들어진 1997년 말 발발한 IMF 경제위기로 인한 대량실업문제로 불행히도 사실상 묻혀버리고 말았다. 참고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고전파가 주장한 임금원리이지만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생활수단의 몫이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가정해보자”(1권, 142쪽)라고 하면서 자본주의 이후 사회의 임금형태로 지목한 것이기도 하다.(“긍정적 이해”의 사례에 해당한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개혁적 과제이고 변혁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서 여기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우리 민주노조 진영은 와해되거나 무력화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상당 정도 그렇게 되었다. 혹시 반대투쟁은 효과가 없었을까? 그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별 노조체계에서 자본가의 의지를 뛰어넘을 노동조합은 하나도 없고 그것은 우리 노동조합들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노동조직이 이처럼 와해되고 나면 김 교수께서 꿈꾸는 변혁은 도대체 “누가”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의 모순과 본질은 산 위에 올라야만 정확히 보인다. <자본>은 바로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단지 산 위에서 그 본질을 인식하기 위해서만 이 작업을 수행했을까? 변혁을 산 위에서 “구상”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막상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산 아래”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산 위에서 단순해 보이는 본질은 실천의 현장에서는 무수히 많은 변수들과 차이들을 만나게 된다. <자본>이 3,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된 것은 바로 이런 다양한 실천적 과제들을 최대한 담기 위한 것이었다고 나는 그것을 위의 임금체계에 실제로 적용한 것이다. 노동계급은 연대의 의식도 가지고 있지만 위의 예에서 보았듯이 개별화의 성향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입체적인 전술이 필요한 것이고 내가 고민한 문제들은 모두 거기에 연루된 것이다.

이들 산 아래의 과제들을 개혁의 과제로 치부하고 “나 몰라라”하는 것은 김 교수의 개인적인 취향이고 또한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마르크스는 산 아래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산 위에 올라간 것이지 산 위에 앉아 변혁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본>을 쓰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를 읽는 나의 관점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연구를 업으로 하는 학자로서 한 마디 충고를 드려야 할 말이 있다. 김 교수는 나에게 수없이 반복해서 내가 마르크스를 “날조”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글을 몇 구절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강 교수는 맑스 이론의 왜곡과 날조를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 강 교수가 입을 열 때마다, 글을 쓸 때마다 왜곡과 날조가 끊이지 않는다. 이 상습적인 날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 강 교수의 이해력은 중학교 수준의 학생만도 못한 것이다 … 강 교수의 맑스에 대한 날조는 계속된다. … 이론 영역에서나 실천 영역에서나 강 교수는 일관된 수정주의자인데….

날조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민 것”을 가리킨다. 요컨대 거짓말인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사실”은 마르크스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마르크스를 직접 만날 길이 없다. 우리는 그를 글로만 만나고 따라서 그의 글을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실제로 마르크스의 해석은 하늘의 별 만큼이나 다양하고 많다. 마르크스를 둘러싼 김 교수와 나의 해석 차이는 두 사람 사이의 차이일 뿐 마르크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 교수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은 당연한 그의 권리이지만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김 교수가 “날조”라고 하는 것은 김 교수가 금도를 넘어서는 일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권리 영역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고 상대를 “날조”로 몰아세울 권리를 김 교수는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다시 한 번 확인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마르크스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김 교수가 마르크스 자신은 아니지 않는가?

자신과 다른 해석에 대해서는 자신과의 견해 차이를 밝히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가 갖는 정당성을 충분히 소명하면 될 일이다.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토론에서는 “차이”가 중요하고 그 차이의 “정당성”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김 교수는 이미 이런 정당성을 소명할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였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한 상태가 된 것이 아닐까? 상대와의 차이를 밝히기 보다는 근거없는 딱지로 자신의 견해를 강변하려는 김 교수의 태도는 과거 민주주의가 무시되던 야만의 사회나 시절에서 보던 것들이다. 우리는 바로 <자본>이 금서였던 시절을 통해서 이미 그런 경험을 겪었지 않은가?

4. 글을 마치면서

김 교수가 처음 비판의 글을 올렸을 때 사실 나는 답글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따로 하나 있었다. 김 교수께서 내 제안을 거부하는 바람에 이제 글을 마쳐야 할 때가 되었으므로 독자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해드리고자 한다. 마르크스와 관련하여 독자들과 수강생들에게서 내가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두 개의 마르크스에 대한 혼란이다. 하나는 소련의 붕괴로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한 마르크스이고 다른 하나는 2008년 공황으로 다시 무덤에서 걸어 나온 마르크스이다. 이들 두 마르크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의 해석과 관련하여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기도 하다. 이 문제의 열쇠는 소련의 볼셰비키와 마르크스와의 관련에 있다. 만일 양자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후자의 마르크스는 곧 퇴장할 운명이 틀림없다. 볼셰비키가 걸어간 길이 실패하였듯이 말이다. 하지만 내가 줄곧 얘기하고 있듯이 볼셰비키의 길이 마르크스의 길이 아니라고 이해한다면 후자의 마르크스는 21세기 공황의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본주의의 대안을 논의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다. 나는 지금 바로 이 후자의 견해를 주장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볼셰비키와 마르크스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대중들에게 소개한 것이다.

결국 내 견해는 지난 세기 동안 마르크스주의를 독점해 오던 볼셰비키의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부른다)에서 볼셰비키의 잔재를 털어내고 온전한 마르크스를 복원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극복할 21세기의 대안적 마르크스주의를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그동안 볼셰비키에 의해 오염된 마르크스주의의 지배를 받아왔다. 소련의 붕괴 이후 민주노조 진영에서 노동운동의 목표에 대한 논의가 급격히 자취를 감추어버린 것은 이 점과 깊은 관련이 있다. 볼셰비키는 지난 70여 년 동안 자신이 내세운 마르크스의 이상과 그렇지 못한 자신의 현실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민주주의와 생산력이 핵심 문제였다) 이 고민을 은폐하기 위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이들이 마르크스의 글을 임의로 발췌, 왜곡, 편향된 주석 등의 방법으로 오염시켜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탈린 치하에서 만들어진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Marx Engels Werke(MEW)가 대표적인 것이며 이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 Marx Engels Gesamtausgbe(MEGA) 작업이다. MEGA는 문헌적 정본작업으로 볼셰비키에 의한 오염을 털어내고 마르크스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작업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내가 지난 2010년부터 어려운 조건을 감수하며 MEGA 한국어판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나 자신도 그동안 이 오염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고 내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자본>도 바로 문제의 MEW판이다. MEGA는 우리나라에서 한 권도 소개된 적이 없고 이는 우리나라에서 볼셰비키의 오염문제가 아직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볼셰비키는 자신의 정당성을 현실로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고민을 지적하는 견해들에 대하여 사민주의, 개량주의, 수정주의라는 딱지를 남발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경향을 보여 왔는데 김 교수는 흡사 이들의 태도를 그대로 닮아 있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정당성은 결국 딱지가 아니라 그들의 현실에 의해 직접 폐기되지 않았던가? 그것이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이다.

나는 “퇴장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돌아온 마르크스”에 주목하고 여기에서 미래의 대안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마르크스를 논의하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볼셰비키의 잔재를 털어내고 “돌아온 맑스”를 찾아나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현재의 실천을 고민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것이 내 입장이고 현재로서는 김 교수와 나는 이 두 가지 점에서 소통의 여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런 점에서 김 교수와의 얘기는 이제 이쯤에서 마무리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마무리를 하느라 글이 많이 길어졌다. 지루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리고 그동안 소중한 지면을 여러 차례나 할애해준 <미디어오늘>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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