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youtu.be/NkVuv0kLqNM

1804년 12월, 베토벤 교향곡 3번 <에로이카>가 비공개 초연되는 현장. 72세 하이든은 젊은 반항아 베토벤의 새 교향곡을 듣고 충격을 금치 못합니다. “상당히 길고 복잡하군. 못 듣던 음악이야. 어떤 작곡가도 이런 걸 시도해 본 적이 없어. 이해하기 어렵고 상당히 소란스러워. 하지만, 정말 새롭긴 하군.” 소감을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한 하이든은 두어 걸음 옮긴 뒤 덧붙입니다.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구나.”

사이먼 셀란 존스 감독의 영화 <에로이카> 중 한 장면(링크 1분 50초)에서 이 극적인 순간이 묘사됩니다. 베토벤 역은 아이언 하트가 맡았고, 엘리엇 가디너 지휘, ‘혁명과 낭만’ 관현악단이 연주합니다. <에로이카>에서 베토벤이 창조한 세계는 하이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기해 모든 게 새로워졌다”는 하이든의 반응은, 자기 시대는 갔고 베토벤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담담히 받아들인 것으로 들립니다.

   
 
 
하이든(1732~1809)과 베토벤(1770~1827)의 관계는 답답하고 불편했습니다. 서로 아끼고 격려해 주던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밝고 환한 관계와 좀 달랐던 거죠. 하이든은 영국의 기획자 잘로몬과 함께 런던으로 가던 중인 1790년 말 본(Bonn, 베토벤의 고향이자 잘로몬의 고향)에 이틀 머물렀고, 이때 20살 베토벤을 처음 소개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든은 1792년 7월, 빈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 근교에서 베토벤을 다시 만납니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뛰어난 재능에 감명받은 게 분명합니다. 1793년 시즌에 런던에 함께 가기로 약속했으니까요.
 
   
 
 
그해 12월 베토벤이 빈에 정착한 뒤 하이든은 1년 가량 베토벤의 스승을 자임했습니다. 베토벤도 무서운 기세로 배우고자 했습니다. “하이든의 손을 통해서 모차르트의 정신을 배우라”는 발트슈타인의 조언을 베토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작곡가’ 하이든이 너무 바빴던 걸까요? 베토벤에게 과제를 내 주었지만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게 서운했는지 베토벤은 훗날 제자 리스에게 “나는 하이든에게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역정을 내며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베토벤을 여전히 자기 제자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런던으로 떠나기 직전인 1793년 말, 하이든이 쾰른 선제후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베토벤은 앞으로 유럽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명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며, 나는 한때 그의 스승이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 사이가 소원해진 탓인지 1794년 초, 하이든은 베토벤을 그냥 둔 채 혼자 런던으로 떠나 버립니다. 베토벤은 하이든과 관계없이 요한 솅크와 알브레히츠버거에게 화성학과 대위법을, 살리에리에게 성악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베토벤을 여전히 아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돌아 온 뒤인 1795년 12월 빈의 레두텐잘에서 <군대> 등 런던에서 작곡한 교향곡 3곡을 연주했는데, 이 때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2번 Bb장조를 초연하도록 배려했습니다. 하이든은 빈의 가면무도회에서 사용할 춤곡과 메뉴엣을 베토벤이 작곡하도록 주선해 주기도 했습니다. 베토벤이 1795년 첫 피아노 트리오를 출판할 때, 하이든은 작곡자 이름 아래 ‘하이든의 제자’라고 써 넣으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반항아는 코웃음을 치며 노스승의 제안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http://youtu.be/gkyKm1UXyPs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1번 Eb장조 Op.1-1, 1악장)

하이든이 마지막 오라토리오 <사계>를 완성하고 유서를 쓴 1801년, 갓 30살을 넘긴 베토벤의 첫 교향곡 C장조가 빈에서 초연됐습니다. 하이든의 시대는 저물고 있었고, 베토벤이 ‘계몽과 혁명’ 시대의 주역으로 급속히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이든의 친절한 배려는 젊은 베토벤에게 어느 정도 힘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토벤이 추구한 음악세계는 ‘음악의 착한 종’ 하이든과 달리 혁명과 자유를 향해 저 멀리 도약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하이든의 음악에서 고전 음악의 양식을 배운 건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정신을 고양시키는 숭고함, 자유분방함 등 베토벤 음악의 본질은 하이든에게 물려받은 게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은 기질이 거의 정반대였기 때문에 소원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계몽사상에 심취했고 혁명에 열광했던 베토벤은 하이든이 평생 귀족의 후원 아래 활동했다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을 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빈에서 경력이 쌓일수록 하이든을 ‘경쟁자’로 여겼고, 자기 독창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1800년 즈음에는 이 대선배의 가르침이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데 질곡이 된다고 느꼈습니다. 베토벤은 자신의 새로운 길은 하이든의 취향과 맞지 않으며, 자기 음악이 하이든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거라고 우려했습니다.

하이든은 베토벤의 무서운 재능을 일찍부터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신참일 뿐인 베토벤이 신속하게 빈의 상류사회에 받아들여지고 최고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인정받는 데 대해 놀라움과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베토벤의 천재성이 빛나기 시작할 즈음엔 그가 자신을 스승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곤혹스러고 안타까웠습니다. 

하이든이 베토벤을 앉혀놓고 직접 가르친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의 존재와 음악 자체가 베토벤 음악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베토벤의 초기 교향곡, 협주곡, 소타나, 실내악곡이 하이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입니다. 하이든의 영향은 베토벤의 초기 작품에 그치지 않습니다. 베토벤의 말기 현악사중주곡, 그 심오한 세계는 하이든의 <십자가 위의 마지막 일곱 말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장엄미사> 또한 하이든의 <천지창조>와 후기 미사곡들이 있었기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세월이 흘러 성숙해질수록 하이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누그러졌고, 늙은 스승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하이든과 담을 쌓고 지내는 것은 베토벤에게도 어색한 일이었겠죠. 자신이 젊고 생산력이 왕성한데 비해 스승이 늙어 가며 일을 못하게 됐다는 점에 마음 한편으로 연민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메이너드 솔로몬 <루드비히 판 베토벤>, 김병화 역, 한길아트, p.210) 두 사람의 화해는 거의 마지막 순간에야 이뤄졌습니다.

   
베토벤 <에로이카> 악보 표지.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표지에서 ‘보나파르트’라고 쓴 부분을 찢어버렸다.
 
베토벤은 1808년 3월, 하이든 76회 생일을 축하하는 갈라 콘서트에 참석했습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연주된 뒤, 베토벤은 하이든 앞에 무릎을 꿇고 연로한 스승의 손과 이마에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습니다. 이후 베토벤은 하이든에 대해 말할 때 과거의 원망과 괴로움 없이 언제나 따스한 존경과 애정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하이든을 헨델, 바흐, 글루크, 모차르트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했고 자신은 그 인물들 옆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1809년 하이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완전히 새로운 음악, 곧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이미 세상에 나와 있었습니다. 

하이든과 베토벤은 애증이 얽힌 사제지간이었고, 결국 시간과 더불어 해피엔딩이 다가 온 셈입니다. 음악에서 타협을 몰랐지만 속마음은 따뜻했던 베토벤이었기에 자연스레 화해의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 뒤 물러나야 할 때를 흔쾌히 인정하고 받아들인 하이든의 지혜를 간과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베토벤 <에로이카> 악보 표지. 그는 나폴레옹이 황제에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표지에서 ‘보나파르트’라고 쓴 부분을 찢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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