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의 외부필진인 김성구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미디어오늘을 통해 '강신준 교수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란 제목으로 경향신문에 연재된 강신준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의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해 비판하였습니다. 이에 '오늘 자본을 읽다'의 필자인 강신준 교수가 김성구 교수의 비판글을 반박하는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을 미디어오늘에 보내와 게재하였습니다. 강 교수의 반박글이 게재된 후 다시 김성구 교수가 반박에 대한 재반박글을 보내왔습니다.

미디어오늘은 경제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며 전세계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인 맑스주의의 바이블이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두 노장 경제학자들 간의 논쟁을 통해 자본론 해석에 대한 학문적 발전이 있기를 기대하며 두 경제학자의 논쟁을 지면을 통해 이어가고 있습니다.  

내 글(“경향신문의 이상한 자본론 강의 - <자본> 역자에 의한 <자본> 곡해①”)에 대한 강신준 교수의 반론(“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은 생각치도 않았던 것이지만, 반론과 재반론을 통해 강 교수의 <자본> 연재에 담긴 이론적 쟁점들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강 교수에게나 나에게나 또는 독자들에게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바심마당’ 칼럼의 짧은 글 두 번에서 7개월에 걸친 연재 글을 검토하기에는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었는데, 이 글을 통해 내 지난 글과 다음 글을 보충하는 기회로 삼고 싶다. 강 교수가 지적한 세 가지 문제를 따라가면서 보도록 하자.


1. 변증법적 유물론의 해석에 대하여

강 교수는 나를 비롯해서 비판자들이 변증법을 긍정속의 부정, 존속과 폐지로 파악하지 않고 변증법에서 부정과 폐지만을 본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로부터 다음 사회로의 이행도 자본주의의 폐절로만 이해하고 자본주의의 존속의 측면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강 교수에 따르면 이런 방식의 변증법의 이해는 심각한 정치적 오류로 이어진다. 즉 자본주의의 성숙한 발전 없이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시도하고 결국 사회주의의 실패와 몰락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강 교수의 이런 반론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내가 변증법을 부정과 폐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강 교수가 변증법에서 긍정과 존속이라는 측면만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강 교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물론 자본주의하 생산력의 발전에 토대를 두고 자본주의 하에서도 발전하는 사회화의 형태들 즉 독점과 주식회사 그리고 국가자본에 근거한다. 맑스와 엥겔스가 주목했던 이행의 형태들이다. 그 때문에 이런 형태들이 충분한 발전 하지 못한 단계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정치경제적 난관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는 이렇게 자본주의의 사회화의 토대 위에서 건설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 형태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게 아니라 그 폐절과 사회주의적 형태로의 전화 위에서 건설된다. 자본주의 하 독점과 국가를 근저에서 규정하는 자본관계, 소유관계, 계급관계의 폐절 말이다. 강 교수는 에필로그에서 자본주의 이후 사회가 소유의 사회화와 개인적 소유의 결합 위에 입각해 있다고 하지만, 변증법과 유물론을 말하는 어디서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소유관계의 폐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긍정과 존속, 성숙만이 강조되어있다.

변증법에 대한 강 교수의 편향된 관점은 그 자신의 이상한 용어사용법과 맞물려서 더욱 논란을 부추겼는데, 그의 이번 반론 글을 통해서 문제의 소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보다 명확해졌다.

현존하는 것들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서는 “부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변혁의 과제로 내가 얘기했던 성숙의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강 교수의 말은 맑스의 변증법을 자신은 ‘성숙’의 의미로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숙이 ‘변혁’의 과제라고 한다.

나는 여기에서 이 성숙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자본주의 개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건설된다는 말입니다.(참고: 나는 “변혁”과 “개혁”을 별로 심각하게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변증법은 ‘성숙’의 의미고 ‘성숙’은 ‘변혁’인데, 변혁이나 개혁은 같은 말이라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강 교수는 참고하라면서 자신은 변혁과 개혁이란 개념을 별로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자본> 연재에서의 강 교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해결되는 지점이다. 나도 그렇고 다른 비판자들도 강 교수가 이런 괴상한 변증법을 왜 맑스의 변증법이라고 주장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 비밀은 강 교수의 해괴망측한 용어법에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강 교수에 대해 맑스를 날조했다라고 비판한 것, 그에 대해 강 교수가 비판자들의 ‘무능과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허풍스럽게 반박한 것은 이 용어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맑스가 변혁과 혁명이라고 말한 것을 강 교수는 개혁이라고 바꿔 말하면서 변혁과 개혁은 같은 말이라고 한 것, 이것이었다(!) 강 교수의 뜻을 헤아려서 다시 쓰면 위의 문장은 이렇게 써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 변혁은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그 위에 [새로운 사회가] 건설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써도 이 문장은 잘못된 것이다. 변혁은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 교수가 만일 “타도”를 “성숙”과 구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했다면, 그는 여기에서 자본주의 이후 사회가 자본주의 “위”에 세워진다는 것에 반대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물론 타도와 성숙을 구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타도와 성숙, 또 변혁과 개혁이라는 상반된 개념들을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강 교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도, 변혁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 성숙, 개혁은 자본주의를 고쳐서 더욱 유지하는 것인데, 이게 같은 말이라고 하면서 비판자들에 대해 당신의 변증법의 정체를 밝혀달라고 강 교수는 주문한다.

변증법에 대한 이 잘못된 이해 위에서 <자본> 연재의 안내판을 제시한 것이었고, 따라서 이 안내판은 <자본>의 이론적, 역사적 의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1848년 혁명의 실패에 대한 성찰로부터 맑스가 자본주의 타도가 아니라 개혁을 혁명의 과제로 설정하고 이에 입각해 <자본>을 집필했다는 강신준 교수의 주장은 문헌적 사실과도 크게 어긋난다.

우선 1849-1850년에 쓴 글들로 간행된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1848-1850>에서 맑스는 유물론적 관점으로부터 48년 혁명의 경과와 실패에 대해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탁월한 분석을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이 혁명은 강 교수의 주장과는 반대로 자본주의 하에서 개혁이 어떻게 가능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는가를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1848년 혁명의 정치경제적 토대는 1847년의 공황이었고, 경기회복과 함께 혁명도 실패하였으며, 다음 공황에서 혁명은 다시 불붙게 될 거라고 맑스는 전망하였다.

이런 관점은 <자본>의 집필기간에도 변하지 않았다. 맑스는 <자본>의 집필을 서두르면서 <자본>의 제1초고라는 1857-58년 초고(<그룬트리세>)를 썼는데, 맑스를 급하게 만든 것은 1857년 공황에 의해 혁명의 불길이 다시 타오를 것에 대비해서 노동자계급에게 이론적 무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1871년 <프랑스에서의 내전>에서도 맑스는 자본주의의 개량은커녕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혁명적 관점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및 계급철폐의 필연성을 이론적으로 더욱 발전시켰다. 이 시점은 1867년 <자본> 제1권이 이미 간행되었고, 제2권을 준비하는 시기였으며, 엥겔스가 편집한 제3권의 토대가 된 1864-65년 초고도 이미 작성된 상태였다. 결국 맑스는 현행 <자본> 전3권의 집필동안 혁명적 관점을 바꾼 적이 었었고, 따라서 자본주의 개혁을 위해 맑스가 <자본>을 집필했다는 강 교수의 주장은 문헌적 근거가 없는 소설일 뿐이다.

공황과 혁명 그리고 자본주의 붕괴에 관한 붕괴론적 관점은 맑스와 엥겔스의 말년에 일정하게 변화한다. 붕괴론적 관점의 공황론은 산업순환으로서의 공황론으로 변화하고, 공황-혁명-붕괴의 단선적인 관점도 지양된다. 1886년 <자본> 제1권 영어판의 엥겔스 서문, 특히 1895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에 대한 엥겔스의 서론에서 그는 공황과 혁명에 관한 당시 관점이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 속에서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하고, 자본주의의 당시의 미성숙이 혁명 실패의 근저에 있는 요인임을 지적한다. 또한 자본주의 발전과 군사기술의 성장에 따른 시가전의 어려움과 보통선거권 제도의 괄목할만한 효과에도 주목한다. 엥겔스의 이런 서술들은 후에 수정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의 맑스 이론 수정의 근거가 되었지만, 엥겔스의 서술을 왜곡하면서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엥겔스는 같은 글에서 그러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시가전도, 혁명도 불가피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 집필 기간만이 아니라 그 이후 맑스와 엥겔스의 마지막 시간까지도 강 교수의 주장은 어디에도 발붙일 데가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2. 수정주의 문제에 대하여

강 교수는 <자본> 연재에서 자신이 맑스의 이론을 수정한 일이 없고, 또 소유의 사회화와 노동해방이라는 변혁의 최고 강령을 밝히고 있는데도 자신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변증법에 대한 강 교수의 잘못된 이해는 이미 수정주의자들의 주장과 다를 바 없는 면모를 보여준다. 강 교수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변혁이란 게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라면, 사회주의란 자본주의의 성숙과 개혁을 통해 달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의 사회화의 형태들 즉 국가와 독점을 사회주의적 요소로 파악하고 이들 형태의 확장을 통해, 그리고 의회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을 통해 사회주의로 평화롭게 이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게 사민주의자들의 수정주의적 입장이었다. 강 교수의 주장이 이들의 입장과 무엇이 다른지, 강 교수에 대해 수정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게 왜 문제가 되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강 교수가 맑스의 이론을 수정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맑스의 이론을 수정하지 않고서도 맑스의 이론을 수정주의적으로 각색하고 채색했다고 말했을 뿐이다. 즉,

베른슈타인 같은 대표적인 수정주의자들이 19세기 말이래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유물론과 변증법으로부터 <자본>의 경제법칙들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경로에 이르기까지 맑스 이론에 오류가 있다면서 그 이론적 수정을 시도했다면, 강 교수는 유물론과 변증법 그리고 사회주의로의 이행경로를 수정주의로 각색하면서도 이게 수정이 아니라 원래 맑스의 이론이 그러한 것이라고 곡해하는 것이다.

맑스의 이론을 수정하지 않고서도 맑스의 이론을 수정주의자들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강 교수의 놀라운 능력인데, 이는 앞서 말한 바처럼 맑스의 변증법과 유물론을 곡해하면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3. 봉건제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 자본주의에서 우화의 역전 그리고 그 원인은 상품교환에 있다는 주장은 <자본> 연재 곳곳에서 나온다. 에필로그에서도 그랬고, <자본> 제1권 첫 부분 상품에 대한 해설도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을 바꾼 교환, 그 가치의 양적 단위는 노동”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며 아래에서 다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이들의 운명을 바꾼 것이 생산과 소비가 교환으로 분리된 때문이라고 얘기했습니다.(‘서문’ 해설 참고) 그런데 교환이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켰다는 사실은 단지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이 역전될 ‘가능성’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 가능성이 어떻게 해서 실현되는 것인지를 우리는 이제부터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런 주장은 봉건제도, 상품교환경제도, 자본주의 상품경제도 왜곡하는 것이라 비판하였다. 봉건제는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가 실현되는 세계가 아니고, 상품교환에 의해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이 역전될 가능성도, 현실성도 없다는 것,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하에서의 운명의 역전은 노동력의 상품화와 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의 착취에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강 교수는 다음처럼 반박하였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착취를 가져온 게 상품교환에 있다는 주장이다. ... 상품교환 자체는 착취의 원천이 아니다. 문제는 상품교환경제가 아니라 노동력의 상품화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상품교환경제고, 여기서는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에 의해 노동하는 인민의 빈곤은 불가피해진다.

김 교수의 이 글은 사실 오해라기보다는 의도적인 왜곡에 가깝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교환은 노동력 상품의 교환이며, 실제 우화가 역전되는 비밀은 교환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력의 교환과 매개된 배후의 생산과정이라는 것도 제법 긴 설명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연재를 조금만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인데 굳이 뒷부분을 읽지 않고 앞부분의 특정 구절을 본래의 내용에서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왜곡을 하고 있는 것은 강 교수 자신이다. 내 원문에서는 윗글에 이어 바로 강 교수의 혼란이 지적되어있다. 다시 옮기면,  

...자본주의 착취를 가져온 게 상품교환에 있다는 주장이다. ... 상품교환 자체는 착취의 원천이 아니다. 문제는 상품교환경제가 아니라 노동력의 상품화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상품교환경제고, 여기서는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에 의해 노동하는 인민의 빈곤은 불가피해진다. 강 교수도 후에 잉여가치를 설명하면서 상품교환 자체에서 착취가 일어나는 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연재 곳곳에서 이런 잘못된 주장을 반복한다.

강 교수는 내가 지적한 바로 그 문제를 인용에서 삭제해 놓고서는 내가 연재의 뒷부분을 읽지 않고 앞부분의 내용을 왜곡한다고 나한테 왜곡의 책임을 뒤집어씌운다. 이렇게 뒤집어씌우면 자신의 오류를 감출 수 있을까?

<자본> 강의의 초두부터 이렇게 우화의 역전이 상품교환에 있다고 하면서 강 교수는 그게 실은 노동력 상품의 교환과 생산과정에 있다는 걸 말한 건데, 이걸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반발한다. 자신은 상품교환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걸 노동력 상품과 생산과정의 뜻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강 교수의 푸념을 도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여기서도 강 교수는 경제학 개념사용에 문제가 있다. 상품교환과 노동력 상품의 교환, 교환과정과 생산과정이란 개념의 구별은 맑스의 잉여가치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인데, 강 교수는 자신의 특유의 용어사용법에서 양자를 굳이 구별하지 않더라도 그때그때 독자들이 알아서 이해하라는 말이다. 강 교수에 대해 날조라는 비판이 나오는 건 앞서와 마찬가지로 강 교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의도적인 왜곡 때문이 아니라 강 교수 자신의 자의적이고 잘못된 개념 사용에 그 책임이 있다.

강 교수는 어이없게도 봉건제를 착취체제가 아니라 자신이 일한만큼 소비하는 사회주의 공동체(?)로 그리고 있다. 봉건제 자체가 착취체제인 게 아니라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착취가 강화되었을 뿐이라고 한다. 이는 역사적 과정을 반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자본> 역자에게 <자본> 제3권 제47장의 봉건지대의 변화에 대한 맑스의 설명을 참조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나아가 강 교수는 봉건제 하의 착취는 경제구조가 아니라 경제외적 강제 때문이라고 한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점은 영주의 수탈이 경제구조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경제와는 무관한 것으로서 대개 “경제외적 강제”라고 부르는 봉건적 권리, 즉 영주권에 의한 것이었다. ... 말하자면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는 경제외적인 수탈 때문에 왜곡되긴 했지만 경제구조 그 자체는 이 우화가 통용되는 구조였던 것이다.

 

봉건제는 봉토와 영주권(경제외적 강제) 그리고 농노지배를 토대로 구성된 생산양식인데, 강 교수는 봉건제를 구성하는 요소인 이 경제외적 강제를 이 경제구조와 무관한, 경제구조를 왜곡하는 외적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봉건제가 개미와 베짱이의 세계라는 강 교수 주장의 핵심은 봉건제의 장원제도가 수탈체제냐 아니냐에 있는 게 아니라 실은 장원과 장원의 관계를 놓고 말한 것이다.

따라서 봉건제에서 생산과 소비의 단위는 공동체이고 생산이 잘된 공동체는 잘 살고 생산이 잘못된 공동체는 가난했던 것이다. 개미와 베짱이는 개별 농노나 영주가 아니라 바로 이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강 교수는 자본주의 하 노동자와 자본가 계급간의 착취의 문제로서 개미와 베짱이의 우화를 제시해 놓고, 이제 봉건제에 대해서는 영주와 농노의 착취관계가 아니라 공동체와 공동체 즉 장원과 장원의 관계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건제의 장원은 개미와 베짱이의 세계다(!) 강 교수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도 개미와 베짱이의 세계다. 운명의 역전은 없다(!) 왜냐하면 부의 생산이 더 많은 기업은 부의 생산이 적은 기업보다 더 많은 걸 소비하기 때문이다. 또 부의 생산이 더 많은 국가는 부의 생산이 적은 국가보다 더 많은 걸 소비하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에서의 상품교환도 생산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또 강 교수의 말처럼 교환은 등가교환이므로 세계시장을 상정해도 자본주의는 개미와 베짱이의 세계가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상황은 물론 달라진다. 독점자본이 지배한 이래 자본주의는 국내시장에서도 세계시장에서도 독점가격의 지배 때문에 등가교환의 원리 즉 가치법칙은 왜곡되고 수정된다. 여기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 자리가 아니다.)

이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본> 역자로서 강 교수의 노고를 정말 존중한다. <자본> 세권의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맑스 특유의 어려운 독일어 문체 그리고 <자본>에 담겨진 경제학의 이론사를 넘는 방대한 문헌,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독일어판 <자본> 번역의 이론적, 정치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누구도 강 교수의 노고와 기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본 바와 같은 강 교수의 <자본> 곡해는 원저자 칼 맑스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강 교수 자신의 노고에 대해서도 결코 합당한 대가가 아니다.

[논쟁 글 순서]
1. 김성구교수의 글 :  '경향신문의 이상한 자본론강의' 
2. 강신준교수의 반박글 :  '경향신문 연재 오늘 자본을 읽다에 대한 김성구 교수의 비판에 대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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