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교수도 연재의 프롤로그에서 <자본>을 읽어가는 자신의 안내판을 제시했는데, 이 안내판은 수정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있어 길라잡이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연재의 시작과 함께 전태일연구소의 박찬식, 박승호 두 박사가 <참세상>에 강도 높은 비판 글을 기고했는가 하면, 인터넷 상에서는 일반 독자들까지 강 교수의 <자본> 왜곡에 대해 분개하는 글들이 떠돌았다. 이들은 왜곡을 넘어 날조라고 비판했고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했다. 혹자는 신문연재라는 대중적 성격의 글에 학술논문의 잣대를 갖고 비판하는 건 어울리는 형식이 아니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적인 글이냐 학술논문이냐가 아니라 그것에 담긴 강 교수의 관점이다. 대중적인 글이라도 문제의 관점은 얼마든지 논쟁할 수 있다.
강 교수는 <자본>의 안내판으로 1848년 혁명의 동력과 실패 이유에 대한 맑스의 성찰을 이해하는 게 관건이라고 한다. 혁명의 동력은 자본관계의 지배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와 빈곤에 있었고, 혁명의 실패 원인은 자본주의가 아직 성숙하게 발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더 발전(!)하도록 자본주의를 개혁(!)하는 것이 혁명의 목표라는 반성 위에서 맑스가 <자본>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강 교수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봉건제가 더욱 성숙해진 체제고, 봉건제는 자본주의에 의해 타파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토대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에 의해 타파되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의 토대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변혁과제는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게 아니라 보다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맑스의 혁명적인 유물사관을 이렇게 수정주의로 채색해 놓고서는 이게 맑스의 역사발전의 변증법이고 유물론이라고 강 교수는 강변한다. 에필로그에서 북유럽의 사민주의 체제를 맑스의 이상세계(자유의 나라)에 가장 접근한 현실세계로서 치켜세우는 것도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 있다.
이 괴상한 역사발전의 변증법이 <자본>의 서술방식에 토대가 되어있다는데, 이런 점에서 강 교수의 <자본> 해석이 역사도 왜곡하고 <자본>도 곡해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착취를 가져온 게 상품교환에 있다는 주장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사회는 생산과 소비가 일치되는 자급자족 경제라서 생산한 만큼 소비할 수 있는 ‘개미와 베짱이’의 세계였는데, 자본주의에서는 교환이 지배하면서 그게 뒤집어졌다는 것이다. 교환으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어 노동하는 생산자는 빈곤해지고 놀고먹는 자본가는 부유해졌다고. 여기에는 이중, 삼중의 왜곡이 있다.
봉건제는 노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 소비를 풍요롭게 하기는커녕 생산자인 농노에 대한 영주의 착취에 기반한 사회였다. 또 강 교수의 주장과는 달리 교환이 일어나는 영역에서 오히려 노동에 따른 성과가 관철될 수 있다. 개미와 베짱이의 세계는 봉건제가 아니라 상품교환사회며, 상품교환 자체는 착취의 원천이 아니다. 문제는 상품교환경제가 아니라 노동력의 상품화에 기반한 자본주의적 상품교환경제고, 여기서는 자본에 의한 노동력의 착취에 의해 노동하는 인민의 빈곤은 불가피해진다. 강 교수도 후에 잉여가치를 설명하면서 상품교환 자체에서 착취가 일어나는 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연재 곳곳에서 이런 잘못된 주장을 반복한다.
김성구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소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