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일어난 메커니즘 자체는 사실 꽤 명확하다. ‘극기 훈련’류에 대한 수요가 원래부터 계속 있었고, 극기를 위한 그룹 단위 고통체험의 극단으로 군대 이미지를 입은 것이다. 그런데 큰 수요에 비해 그런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제도는 씨랜드 참사 이후 십수년이 지났어도 헐렁하고, 온갖 업자들이 난립한다.
관리제도는 허가 기준을 높이고 배상규정을 강화하는 등 기술적 규제의 영역이다. 하지만 수요는 좀 더 미묘하다. 왜 그런 식의 체험에 사람들을 보내는 것을, 충분히 많은 이들이 선호하고 있는가. 고통을 함께 겪으며 싹트는 전우애, 집단적 처벌과 극복의 경험 등이 조직 생활에 도움이 되리라는 조직 차원의 효용에 대한 믿음, 그리고 소위 ‘정신력’의 향상을 얻어 개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리라는 개인 차원의 효용에 대한 믿음을 꼽아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종종 비판적 입장에서 사용하곤 하는 ‘병영사회’라는 용어가 사실은 다소 부적절해지는데, 극기훈련류에서 흉내 내려 하는 것은 병영 생활에서 군사작전의 효율성을 명목으로 도입하는 몰인격화된 계급 위계가 아니라 딱 신병훈련소이기 때문이다. 즉 교관 아래, 집단의 모두는 평등하게 고통을 받는다. 사람들의 친숙한 상상력의 충족을 위해 군대라는 이미지를 입혔을 뿐, 기본적으로는 통과의례에 대한 환상이다. 정신력도 협동력도 부실한 개개인이 있는데, 함께 묶어 고통을 겪게 하면 강해져서 나온다는 보편적이고(스스로도 그렇게 해서 제대로 성장했다는 기억의 사후 정당화가 이뤄질 정도로) 호쾌한 거짓말 말이다.
정신력과 집단적 고통의 통과의례를 뜨거운 오락물 코드로서 즐기고 마는 것을 거부하고, 자꾸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면 곤란하다. 빨간 망토를 두르고 높은 곳에서 나는 슈퍼맨이라며 뛰어내리는 것만큼이나 판타지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곤란함이다. 조직에서의 협동력이든 어떤 일을 더 끈기 있게 추구할 수 있는 지속력이든, 캠프에서 상황극으로 연출해낸 고통의 통과의례로 간편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이 착각되곤 하는 ‘전우애’와 ‘정신력’ 같은 것들과 거리가 멀다. 적절한 공동체 목표와 협의에 의한 통제를 겪어보게 하여, 민주적 상호 작용의 어려움과 그것이 성공할 때 이뤄내는 합리성을 체화시키는 지난하고 지속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왕 청소년기의 12년 이상을 공교육에 할당한 사회인데, 그런 틀거리나 좀 신경 쓰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