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과연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란 말인가? “매일매일 앞에 달려가는 얘들 등짝만 보며 사는 기분이 어떤 건지. 나 이제 열 아홉인데 왜 그렇게 살아야 돼?” 신수원 감독의 신작 <명왕성>에서 주인공 이준이 하는 절규이다. 사실 <명왕성>을 통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이 한마디에 다 들어있다. 끊임없이 학생들을 입시 교육으로 몰아넣고 있는 지금의 입시 풍토에서 등수는 곧 서열이 된다. 자기보다 앞서 있는 학생을 이겨야만 자신의 등수가 올라갈 수 있으니, 앞에 있는 학생의 등짝만 보고 달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달려가고 있는 학생은 더 앞에 있는 학생의 등짝만 보고 달리니, 끝없는 경쟁교육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 수직적 교육 현장이 되지 않을 수 없고.

가련한 것은 그렇게 경쟁 교육에 치여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고작 십대 후반의 청소년들이라는 사실이다. 아니다. 인생이라는 긴 시간대에서 보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꿈 많은 청소년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들은 이미 패배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과연 이것을 교육(敎育)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말 그대로 가르치고 육성하는 것인가?

   
영화 <명왕성> 포스터.
 
지난 10여 년 동안 실제로 교편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영화 감독이 되기로 마음 먹고 영화를 공부한 신수원 감독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끔찍한 학교 생활을 그린다. 그가 그린 학교는 학생들의 우정이나 스승의 가르침이 있는 곳이 아니라 지독한 경쟁의 입시 교육이 판을 치는 곳이다. 학교에서는 철저하게 우열반의 교육을 강조한다. 심지어 교장은 1등만 하던 유진이 죽은 뒤 찾아온 형사에게 “학생 하나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피해를 봐선 안 돼죠?"라고 말할 정도이고, 선생은 우등생을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 그보다 못한 학생이 잘 써낸 레포트를 참고하도록 줘버린다.

학부모의 치맛바람이 빠질 수 없다. 고위층의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들이 학교를 좌지우지하고, 고액 과외를 통해 자기 자식만 집중 관리한다. 자식들보다 못한 99%는 철저히 무시한다. 그런 것이 일상화된 교육 현장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등장한다. 

이런 내용만 다루었다면, <명왕성>은 입시 교육을 고발한 현실성 있는 영화라는 평가에 그쳤을 것이다. <명왕성>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흥미롭게도 신 감독은 입시 교육 문제를 스릴러와 미스터리 형식으로 그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명문사립고에서 항상 1등만 하는 유진이 학교 뒷산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당연히 떠오르는 질문, 범인이 누구이고 왜 죽였을까? 이제부터 관객은 학교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의혹 속으로, 그 미스터리 구조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게 된다. 형사는 현장에 떨어진 핸드폰을 토대로 준을 용의자로 지목하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다.

   
영화 <명왕성>의 한 장면.
 
대부분의 미스터리 영화가 그런 것처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서서히 비밀의 문을 열어 젖힌다. 전학 온 가난한 준은 강북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하위 성적을 보고 놀란 뒤, 유진이 이끌던 비밀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려 한다. 상위 1%만 비밀스럽게 조직한 스터디 그룹. 그러나 그곳에는 비밀이 있다. 한 번 들어오면 나가지 못하는 스터디 그룹이다. 영악하게도 그들은 부모의 재력을 바탕으로 단결하면서 자신들만의 오답 노트를 만들어 그들끼리 공유하며 지위를 계속 유지한다. 그 조직에 들어오려는 학생에게는 가짜 오답 노트를 줘 통제권 안에 집어넣는다. 

때가 되면 조직에 들어온 새로운 학생을 내치는데, 그 방식이 지나칠 정도로 잔혹하다. 여학생은 강제로 성폭행한 뒤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겠다고 위협해 자살하게 만들고, 남학생은 학원 강사를 폭행한 범인으로 몰아 퇴학시켜 정신병자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여학생에게 잔혹한 육체적 폭행을 가해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게 만든다.

   
영화 <명왕성>의 한 장면.
 
준을 범인으로 몰았던 이들이 노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변한 유진을 죽인 뒤 준까지 처리하려 했던 것. 비밀 스터디 그룹에 들어가기 위해 비윤리적 고통을 당했던 준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뒤 명문대 수시입학 축하파티를 하려는 이들을 인질로 잡고, 우등생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그 추악한 모습을 까발린다. 보험 영업을 하는 가난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겨우 열 아홉인 학생이 느낀 좌절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다.

흥미롭게도 이들이 다닌 학교는 안기부 건물이 있던 자리였다. 때문에 지하에는 일반인이 모르는 비밀 공간이 있는데, 그 음습한 공간이 바로 스터디 그룹의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온갖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신수원은 이 스터디 그룹이 결국 군부 정권의 국민 통제 방식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 확대하자면, 이런 엘리트 교육을 노골적으로 육성한 것이 군부 정권이라고 비판하는 것 같다.

이 영화를 통해 신수원이 하고자 하는 말은 간단하다. 지금의 학교는 음모와 계급이 지배하는 공간이 되었고, 그 뿌리는 군부 교육과 밀접히 닿아있다는 것. 그래서 <명왕성>은 때로는 지극히 현실적이다가 때로는 지독히도 비현실적인데, 기묘하게도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영화 속에서 적절하게 조우한다. 우리의 교육 현실이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적이지만 도저히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

마지막으로, 제목인 <명왕성>은 태양계의 행성이었다가 행성의 지위를 잃은 별을 말한다. 영화의 광고 카피처럼, 태양계가 되고 싶은 작은 별의 항변을 입시 교육의 현실에 빗댄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