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권력은 물질적 요소(토지, 천연자원, 기계)의 소유가 아니라 비물질적 요소(과학지식, 하이테크, 정보, 통신, 광고, 금융)의 지배를 통해 발휘되고 있다. 경제가 탈물질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는 석유나 식량같이 소비되는 게 아니라 사용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권력은 생산자에게서 소비자에게로, 소수자에게서 최대다수에게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세계 톱기업 20개업사중 마이크로 일렉트로닉과 정보처리를 하는 기업은 1개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6개사에 달하고 있다. 비물질화의 증거이다. 세계의 새 지배자들은 전자, 정보처리, 원거리통신, 컴퓨터소프트, 라디오·TV, 신문·출판, 유통, 레저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소수 기업의 회장과 경영위원회 멤버들이다. 이들은 서로 제휴를 생각하고 있어, 앞으로 통합된 10여 개의 세계적 네트워크가 거대한 전쟁기계가 될 전망이다. 이 전쟁기계의 유일한 노림수는 새 시장의 정복과 지배이다”


프랑스 르방 가톨릭대학의 리카르도 페트렐라 교수가 지난 5월 ‘르동드 디플로메티그’에 쓴 <정복자들의 귀환>이란 글 중 일부이다.

그가 날카롭게 지적했듯 지금 세계는 ‘하드에서 소프트로’급속히 권력중심이 이동 중이다. 한나라 차원에서 볼 때 초정보혁명은 소수 정치권력, 자본에게 집중돼 있던 기존 권력독점 체계의 파괴라는 역사적 순기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국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정보 제국주의’ ‘정보 패권주의’ 시대의 도래라는 새로운 위기를 의미한다.

이런 위기감은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실제로 세계최대 정보대국 미국에서는 지금 21세기 글로벌 정보패권을 겨냥한 전쟁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다. “지금이야말로 행동할 때이다. 정보 초고속도로는 미국을 21세기의 최강국으로 만들 것이다.” 미국의 정보패권 전쟁은 93년 초 정권을 장악한 클린턴 정부의 2인자 앨 고어부통령의 이 유명한 테제로 불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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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초고속도로’로 명명된 미국정부의 정보 인프라 구축 작업은 당시 실리콘 밸리와 할리우드를 거점으로 멀티미디어 산업을 일구고 있던 민간 정보산업체들의 욕구와 맞물리면서, 미국 정보산업의 경쟁력을 단번에 세계최강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민간기업의 높은 국제경쟁력을 무기로 글로벌 정보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미 행정부가 추진한 양대 작업은 지구정보기반(GII) 구축과 독점금지법 개정이었다. 94년 7월 나폴리 G7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지구정보기반 구축의 골자는 현재 한국 등 세계각국이 수천 조원을 들여 경쟁적으로 건설중인 초고속 정보통신망을 하나로 연결, 각종 정보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GII 제안 이면의 진짜 노림수는 수천 조원대의 투자비를 차지하자는 데 있었다. 이 거대한 열매를 따내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호환기 등 다종 다양한 기기의 새 규격으로, 미국은 GII 구축과정에 앞선 자국기술을 ‘세계규격’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미국은 아울러 일단 자국기술을 세계규격화하기만 하면 향후 GII를 매개로 창출될 엄청난 부도 독식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정보패권을 겨냥해 미국이 추진중인 또 하나의 작업은 정보산업관련 독점금지법의 대폭완화이다. 미국 하원은 지난 4일 전신전화사의 방송산업 진출 허용 및 TV사의 신문사·CATV·라디오국 소유 허용 등, 그동안 철저히 규제해온 멀티미디어 관련업체의 상호통합을 허용하는 독점금지법 완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미 상원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통과된 이 개정안은 상하원 협의과정을 거쳐 올 11월 정식으로 입법될 예정이다.

이 법안의 노림수는 전세계 멀티미디어시장을 영구히 장악할 ‘USA 멀티미디어 공룡’의 탄생이다. 이미 미국의 영상산업 등은 상대할 적이 없는 절대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은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영화, TV, CATV, 신문, 통신, 전자오락, 홈쇼핑, 홈뱅킹 등 모든 멀티산업을 하나로 수직 통합시켜 천년제국을 건설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월트 디즈니의 ABC 매입, 웨스팅하우스의 CBS 매입 등 미국 미디어계에서 가공스런 인수합병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연말에 완화될 정보 독점금지법 완화에 자극받은 공룡 만들기이다.

앞서 페트렐라 교수가 예언했듯 지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미디어계는 새 시장의 정복과 지배를 겨냥한 전쟁기계, 즉 ‘글로벌 네트워크’ 창출에 여념이 없다. 신공룡시대 개막 앞에 과연 우리 미디어계는 살아남을 실력과 자신이 있는가. 거울을 들여다볼 때이다.

박태견/문화일보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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