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회사(갑)가 2억원 규모의 프로그램 개발 프로젝트를 발주한다. 이 프로젝트를 수주한 B회사(을)는 발주금의 절반인 1억여원을 챙기고, 중견 소프트웨어 개발회사 C(병)에 하청을 준다. C회사는 이 프로젝트를 또 다른 중소업체 D(정)에 재하청을 주면서 6천만원을 가져간다. D회사는 프리랜서 개발자(무, 월 300만원)와 직원(월 240만원)에게 개발 업무를 맡기며 나머지는 모두 수익으로 챙긴다. 
 
발주 당시 6개월이었던 프로젝트 기간은 하청에 재하청을 거듭하면서 실제 마지막 단계의 개발자들에겐 고작 2개월의 기간이 주어진다. 개발자들은 이때부터 밤을 새면서 개발을 겨우 마친다. 
 
한 개발자가 인터넷에 올린 실화를 재구성한 사례다. 갑을병정무기로 이어지는 다단계 하청이 IT(정보통신)업계의 흔한 풍경이다. 
 
한국 IT업계는 많은 부분이 건설업계와 비슷하다. 무엇보다 발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산업 구도와 문화, 관행은 흡사하다. 특히 종속적인 하도급 문제는 대표적인 두 업계의 폐해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다. 
 
오히려 건설업계는 IT업계에 비해 산업 역사가 오래되면서 문제가 많이 노출됐고, 노동조합의 투쟁으로 어느 정도 개선이 된 점도 있다. 그러나 최근 성숙기에 접어들었고, 대부분 노동조합도 없는 IT업계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 웹툰 '모험회사'
 
IT업계는 크게 하드웨어분야(반도체, 휴대전화 등)와 정보통신분야(이동통신) 그리고 소프트웨어(SW)분야로 나뉘다. SW분야는 다시 게임, 포털 서비스, SI(시스템통합)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중 가장 하도급 문제가 도드라지는 곳이 SI시장이다. 건설업계는 대개 2~3차 하도급에 그치지만, SI시장은 많게는 6~8차까지 하청이 내려간다. 
 
SI는 정보시스템의 개발, 관리, 운영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장으로 대부분 대기업 계열사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삼성 SDS, LG CNS, SK CNC가 '3대 SI업체'로 자리를 잡고 있고, 대우정보통신, 쌍용정보통신 등이 중견 SI업체로 뒤를 잇고 있다. 
 
수십억원 단위의 큰 SI 프로젝트는 대개 3대 SI업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면 된다. 대부분 발주처가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그룹 계열사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대기업 SI업체의 공공 프로젝트 수주를 제한하고, 그룹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를 단속하고 있지만 컨소시엄 등을 통한 편법 수주가 횡행한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작년 SI업계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SW산업 표준 하도급계약서’를 개정하는 등 하도급 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러나 대기업 발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업계에서 3대 SI업체의 눈에 거슬렸다가는 생존이 어렵다는 점을 알기 때문에 별다른 개선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 웹툰 '모험회사'
 
'힘의 불균형'을 이용한 대기업 SI업체들의 약탈적 행위도 심각하다. 경력 16년 차인 한 SW 개발자는 "중소업체들은 수주를 받는 게 중요하다보니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단 프로젝트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면서 "대형업체들은 이를 이용해서 계약서를 프로젝트 중후반에 작성하고 추가발생 비용은 지불하지 않거나, 대금 지불을 미루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대형 SI업체가 계약내용을 폭 넓게 설정해 하자·유지보수를 끊임없이 요구하거나, 심지어 하청업체의 고유기술을 빼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또 중소업체와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 개발자의 경우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중간업체가 도산하면서 급여를 모두 떼이는 경우도 많다. 하도급 단계가 내려갈수록 임금 수준이나 업무 환경은 어려워진다는 얘기다. 
 
경력 14년차 한 SW 개발자는 "초급 개발자 시절 월 300만원의 급여를 약속받고, 홈네트워킹 솔루션을 제작해 일본 맨션에 납품하는 W사의 관리웹사이트 모듈 개발에 참여했으나 회사는 최저임금인 월 70여만원을 지급했다"면서 "출퇴근은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고용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으니 입금액의 증거가 없어 70만원만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 웹툰 '모험회사'
 
대기업 SI 하도급 구도는 이렇다. 일단 발주처인 대기업 계열사가 프로젝트를 발주하면 계열사인 SI업체 수주한다. 업계에선 이를 '슈퍼을'이라고 부른다. 이 계열사 SI사업체는 다시 중견 협력업체(100~200명)에 하청을 준다. 대기업 SI업체들은 각 사별로 정해진 10여 개 안팎의 중견 협력업체(병)와만 거래를 한다. 대부분 대기업 출신 전직 임원이 사장이나 임원으로 있는 회사들이다. 대기업의 전관예우다.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총괄은 병이 맡는다. 병은 프로젝트를 업무별로 나눠서 정1, 정2, 정3 등 중소업체(10~50명)나 프리랜서에게 하청을 준다. 이때부터 등장하는 게 흔히 'IT보도방'이라고 부르는 용역파견회사다. IT보도방은 개발자를 직접 고용해서 파견을 보내거나 프리랜서를 연결해주고 월별로 수수료를 떼어간다. 
 
개발자들은 악덕 IT보도방이 하도급 문제를 악화시킨다고 지적했다. 한 개발자는 "프리랜서 개발자들이 늘어나면서 IT 문외한인 사람도 IT보도방을 차리고 있다"면서 "계약 때와 개발 끝날 때나 한두 번 얼굴을 보는데, 소개만 해주고 개발자들의 임금에서 매달 10%, 많게는 50%까지 떼먹는 걸 봤다"고 말했다. 그는 제조업 등 다른 분야에 용역파견업체를 하던 이들이 돈이 된다는 소식을 듣고 IT업계로 넘어오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얼마 전에 제가 계약했던 제조업계 출신의 용역파견업체 사장과 식사를 했습니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저보고 용역파견업체를 하라고 하더군요. 한 10명만 관리하면 앉아서 웬만한 과장, 부장급 돈은 떨어져서 놀고먹을 수 있다고. 밥 맛 떨어지더군요."
 
   
▲ ⓒ권범철 화백
 
IT산업이 성장하던 초창기에 프리랜서 개발자는 특수한 기술을 가진 전문가들 위주로 고임금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엔 초중급 개발자들도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나서면서 인력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정규 채용보다 파견 인력을 선호하는 시장의 요구와도 맥이 닿아있다. 또 개발자들 스스로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몸값을 키우기 위해 도전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파견직 중심의 고용형태는 IT업계의 고용 불안정과 급여 하향화를 촉진하고 있다. 대개 3~9개월 단위로 이루어지는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못해 수개월 동안 놀고 있는 프리랜서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다 보니 고급 개발자가 일거리가 없어 중급 개발자의 업무를 맡아 중급 임금을 받는 경우도 있다. 
 
프리랜서는 급여 면에선 정직원 보다는 많이 받는 편이다. 프로젝트와 프리랜서가 가진 기술 등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대략적으로 매월 초중급(2~3년차) 350만원, 중급(7년 이상) 450만원, 고급(10년 이상) 550만원 수준의 임금을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많아 보일지 몰라도 프로젝트 기간 동안 12시간 이상 일하는 게 다반사며, 프로젝트가 없을 땐 수익이 없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 웹툰 '모험회사'
 
개발자들은 IT산업 발전을 위해서라도 정부가 나서서 하도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 중소 SI업체 사장은 "이쪽 업계엔 수주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는 영세한 기업들이 많다"면서 "하도급이 많아질수록 결국 피해를 보는 건 개발자들"이라고 말했다. 
 
한 개발자는 "근무환경이 나빠지고 파견직이 늘어나는데 어떻게 좋은 결과물(프로그램)이 나오겠느냐"며 "하청업체 직원이나 프리랜서들에게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도 무리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최소한으로 설정한 계약기간에 맞춰 개발하기에도 벅차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업계 문화가 최근 금융권 전산시스템에서 일어나는 대형 사고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대선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공약집에서 "건설·IT분야의 하도급 불공정특약에 따른 중소사업자의 피해를 방지하겠다"면서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개정과 함께 공정거래위원회 관리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또 다른 개발자는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국정목표로 내세웠고, SW와 콘텐츠를 창조경제의 중심축으로 삼았는데 SW업계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공약대로 하도급 문제 해결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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