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특수 업무’ 수행 중 뭇 눈길의 과녁이 된 권력의 상징(象徵)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에서 비롯된 듯한 이 유행, 금력(金力)의 상징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이 사회적 배려의 대상자임을 자처하며 결과적으로 티끌 같은 선생님 등을 범죄자로 타락시킨 행태에 대한 소감도 ‘불찰’이니 홍두께 같은 이 유행 제대로 막 올랐나?
얼굴 좀 두꺼운 이들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제 잘못을 마지못해 인정하며 들먹이는 단어로 오용되는 사례다. ‘잘 못 했습니다.’가 아니고 ‘살피지 못했습니다.’라는 것이 불찰이다. ‘미안합니다.’ 대신 ‘내 마음에 꺼림칙함이 좀 있습니다.’라며 한 발 뒤로 빼는 뻔질거리는 말 유감(遺憾)처럼. 하긴, 그만큼 행세하는 이들 쯤 되면 무슨 말인들 못할까. 솔직하지도 않고, 다만 비겁한 어법이다. ‘큰 일 하시는 이들’이니 하며 한풀 접어 줘도 듣는 사람을 바보로 알고 하는 (듯한) 이 말투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 말을 온전한 사과(謝過)로 받아들이는 것은 말뜻을 몰라서인가, 아니면 발언자의 위세에 눌려서인가? 언론도 그 말씀들 따라 적기 바쁘다. 모두, 하릴없이.
타자수(打字手)라는 옛날 직업, 다른 사람(윗 사람)의 말이나 대충 적은 글을 타자기를 써서(두드려서) 번듯한 문서(文書)로 만드는 일을 했다. 워드프로세서 역할도 해 내는 개인컴퓨터의 시대가 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대개 젊은 여성들이었다. 이 타자수들도 말이나 글에 잘못이 있으면, 제 아는 한도 안에서는, 바루어 썼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았겠는가?
찰(察)의 일부인 제(祭)의 초기 글자 갑골문은 피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든 손이고, 금문은 제단(祭壇)의 그림이기도 한 보일 시(示)가 덧붙었다. | ||
축구스타 기성용 같은 이까지 “저의 SNS 글에 관련한 문제는 모두 저의 불찰입니다.”라고 그 행렬에 줄 섰다. 팬들의 사랑 먹고 산다는 연예인인 정형돈이라는 이마저 ‘함량 중량 미달 돈가스 사태’에 불찰론(論)을 편 것을 보면 개콘 보듯 마냥 웃자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잘못’이 아니고 한갓 ‘실수’ 정도라는데, 그게 웃어넘길 일인가?
불찰(不察)을 사전은 ‘조심해서 잘 살피지 아니한 탓으로 생긴 잘못’이라 푼다. 말하자면 조건부(條件附) 잘못인 것이다. 본질적인 의미의 잘못은 아니나 ‘주의를 기울여 챙겨줘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데서 생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는 뉘앙스다. 다시 설명하자면 ‘불찰=잘못’이 아니다. 관련성은 있지만, 무게도 어감도 다른 말이다. 꼬투리 즉 단서(端緖)가 붙은 이 말 불찰을 사과랍시고 내붙인 그 유명인사 제씨(諸氏)들에게 우리 시민들이 흔쾌히 “그래 잘못 뉘우쳤으니 그만하면 됐네.”하며 너끈히 마음 풀 수 없음은 당연하다. 사과는 상황에 맞는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찰찰불찰(察察不察)이란 말이 있다. ‘찰찰이 불찰이다.’라고도 쓰는 이 말은 ‘밤새 궁리한 꾀가 제 죽을 꾀’라는 속담과도 통하는 저자 거리의 말이다. ‘잘못했습니다.’로 해결될 일을 ‘제 불찰입니다.’하여 긁어 부스럼 만든 꼴이 됐다. 사과하는 시늉만 내겠다는 비겁한, 음흉한 의도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강상헌 언론인 ·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 ||
<토/막/새/김>
찰(察)은 면(宀)과 제(祭)의 합체다. 또 생김새 때문에 갓머리라고도 하는 宀, 고기 육(肉), 손 우(又), 보일 시(示)의 합체이기도 하다. 이 4글자들의 어원은 그림이다. 그림이 디자인화(化)하여 이룬 기호들이 모여 (뜻을 합쳐) 연관되는 다른 뜻을 짓는다. 고기[肉]를 손[又]에 들어 (신에게) 보이는 것[示]이 제사(祭祀)다. 집[宀]에서 제사[祭]를 지내기 위해서는 제수품(祭需品)도, 제단[示]과 조상 신 오시는 현관도 깨끗해야 한다. 살핀다는 뜻으로 察이 쓰이게 된 유래다. 그림 보듯, 시(詩) 읽듯 직관(直觀)의 문자 한자를 새기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