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스페인의 한 양로원. 90세 노인은 인생을 정리하는 딱 5초 동안 하늘을 날아오른다. 그렇게 그는 짧은 비행으로 인생을 마치지만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또 다른 비행을 꿈꾸고 있다.

권력에 저항하며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정의로운 사회를 꿈꿨지만, 결국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부르주아와 착취자들의 삶을 ‘생활’이라는 굴레에 갇혀 그대로 답습하며 고뇌하던 한 인간의 삶과 역사를 보여준다.

이 책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을 통해 아버지의 생애를 재탄생시킨 저자 안토니오 알타리바는 문학·시나리오 작가이자 소설가이며 바스크 대학교 불문학과 교수로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1910년 시골 가난한 농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난 주인공 안토니오. 아버지의 폭력, 도시로의 탈출, 실업자, 군사독재, 두 번째 공화정, 스페인 내전, 프랑스로의 탈출, 제2차 세계대전, 레지스탕스, 귀국, 그리고 프랑코 독재정권까지….

유럽과 스페인의 격동적인 현대사를 온 몸으로 맞아야 했던 그의 인생에서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역사를 연상해 내기에 모자람이 없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 안토니오 알타리바 글· 킴 그림 / 길찾기 펴냄 / 2013.7
 
제국주의 폭력 시기에 아나키스트를 꿈꿔왔던 이상과 20세기 초 스페인 내전에서 20세기 중반 한국전쟁을, 프랑코 독재에서 박정희 독재까지. 동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 세대들의 고단했던 삶이 현재 우리 세대와 자녀 세대들에게 던지는 메시지일지 모른다.

특히, 이 책은 ‘만화’라는 장르와 만나 스페인 만화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최고의 찬사를 받는다.

2010년 스페인 국립 만화대상을 비롯 28회 바르셀로나 살롱 델 코믹 3관왕(최고 스페인 작가상·각본상·작화상), 2010 카탈루냐 만화대상, 33회 디아리오 드 아비소스 리얼리즘 만화대상 최고 각본상, 조르나다스 드 아빌레스 비평가상 최고 작가상과 최우수 작품상, 2009 깔라모 엑스트라오디너리 프라이즈 등 스페인 내 만화 관련 상을 거의 독식했다.

이러한 전폭적인 찬사는 스페인 뿐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각지에서도 번역 출간돼 화제를 모았으며, 이번에 해바라기 프로젝트 번역으로 한국에 소개됐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당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비극적인 생애로 이야기 한다. 이 이야기는 그림을 그린 킴 덕분에 한층 더 풍성하게 표현된다. 사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림과 연출, 풍부한 비유와 상징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저자는 마지막 책에서 “말로만 표현되는 소설보다도 더 다양하게 인물들 한 컷 한 컷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면서 “특히, 시각적 은유법의 적절한 구사를 통해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주인공이 이제 막 태어난 자신의 아들과 만나는 장면.
 
한편, 책은 비인간적인 관료주의와 권위적이고 오만한 민주주의의 횡포에 대해서도 질타한다.

주인공이 마지막 생을 다할 때까지 양로원에 3일을 더 있었다고, 월 시설 사용료 중 일부인 34유로(현재기준 약 5만원)를 더 지불하라고 한 것.

저자는 양로원을 입소자 ‘보호소홀’로 고발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안전에 더 주의해 줄 것과 부친상을 당한 자식의 애도를 존중할 것을 조언하는 내용과 함께 34유로를 지불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원장에게 보냈다.

하지만, 양로원을 비롯한 행정기관의 비인간적인 횡포는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34유로에 대한 3년 동안의 연체료와 이자를 내라고 요구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가 끝나는 시점이 막 지난 후였다.

저자는 결국 국세청까지 동원한 행정기관에 패배하고 만다. 저자가 선택한 마지막 수단은 바로 글쓰기였다. ‘아버지를 알리고, 세상을 향해 고백하고 고발 할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주인공이 양로원에서 마지막 생애를 위한 비상을 준비하는 장면.
 
이 책은 급변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시대를 살아온 한 남자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지만, 전쟁과 혁명, 민주주의 등 그 속에 깔려있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사이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동맹’과 ‘유대’를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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