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태 릴레이 기고>
나는 왜 한국일보 기자들의 싸움을 지지하는가
- 조희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쫓겨난 한국일보 기자들, 그들은 기사를 써야 한다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국일보 기자들이 치열하게 써 낸 기사를 다시 보고싶다
- 한유주 소설가

1990년 4월 나는 일간스포츠에 입사했다. 한국일보, 서울경제신문, 코리아타임스 동료들과 함께였다. 우리에겐 52기라는 기수가 주어졌다. 소속 매체와 관계없이 돌아가며 한국일보 사회부에서 경찰기자 수습을 해야 한다고 했다. 엔터테인먼트 관련 기사가 많던 일간스포츠에서 영화 기사나 쓰면서 살자고 막연히 생각했던 나는 이렇게 해서 몇 달 간 남부경찰서(현 금천경찰서)에 나가게 됐다.

매일 밤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찰서에 왔다. 경찰서 형사계에서 보는 세상은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또한 내가 모르던 세상의 실체였다. 학생들의 시위가 있는 날 밤에는 경찰서 유치장에서 잡혀 온 학생들과 잡아 온 전투경찰들, 두 비슷한 또래 집단 간에 험악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눈을 부릅뜨고 그들 사이에 있었다. 내가 지켜보는 한 최악의 장면은 없었다. 그것은 한 사회부 선배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지켜만 봐라. 그것만으로 기자는 세상의 많은 것을 지킬 수 있다.” 기자 일이란 지켜보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안 보는 곳, 권력이 가리려는 곳을 지켜보기만 해도 많은 부당함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몇 년 뒤 나는 그 지켜보는 것을 포기하고 신문사를 나왔지만 한국일보는 그 전이나 그 후나 엄정하게 세상을 지켜봐 왔다. 불편부당하게 지켜보는 일, 그것이 신문으로서 내가 아는 한국일보의 정체성이었다. 치우치지 않아서 때론 유약했지만 그래서 더욱 골고루 지켜볼 수 있었다. 치우친 시선이 만든 얼마나 많은 그늘들이 한국일보에 의해서 비춰져 왔던가?

그 뒤로 나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여러 시간을 전전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중학동을 지나면 늘 그곳에서 보낸 내 젊은 날의 시간들이 생각났다. 인사동에서 광화문 쪽으로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왼편에 한국일보가 있었다. 그 한국일보 건물 뒤로 종로1가까지 전성기의 한국일보가 섭렵하던 거대한 한국일보 구역이 있었다. 지금 레지던스 호텔이 들어선 자리에는 거대한 맨땅 주차장이 있었다. 취재 나가는 기자들이, 기자들을 만나러 오는 취재원들의 차량들이 쉴 새 없이 그 맨땅의 주차장을 꿀렁거리며 오갔다. 저녁이면 초판 가판과 지방판을 배달하느라 수십 대의 트럭들이 그 앞길을 메웠다. 배송 직원들이 신문더미를 던지며 질러대는 소리로 골목은 항상 정신없이 시끄러웠다. 그 종이와 잉크 냄새 사이로 일을 마친 기자들은 삼삼오오 수송동 술집들을 향해 걸어갔다. 야근 기자들은 일차만 하고 아쉽게 회사로 들어왔고, 밤새 큰 사건이 있는 날이면 새벽에도 마감을 마치고 쏟아져 나온 기자들로 수송동 골목들은 떠들썩했다.

문과 계열의 최고 인재들이 언론사로 몰려 들던 시절이었다. 언론이 권력이 아니었지만, 그 권력을 견제하는 유일한 세력이라는 자부심으로 기자들의 눈빛은 형형했다. “경찰서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라”는 선배들의 가르침은 차라리 귀여운 것이었다. 선배는 남자든 여자든 성 뒤에 형이라는 호칭을 붙여 불렀다. 김씨 성을 가진 선배는 김형이라 했다. 존칭도 아니고 중칭도 아닌 묘한 호칭이었다. 부장, 국장, 사장까지 절대로 직함 뒤에 ‘님’을 붙이지 않았다. 20대 신입 기자가 50대 부장을 습관적으로 부장님이라고 불렀다가 선배들에게 혼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불필요한 권위나 위계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언론노조 한국일보사지부 조합원 백여명은 지난달 17일 오후, 서울경제·코리아타임즈 등이 입주해 있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임광빌딩 13층 서울경제 편집국 앞에서 ‘짝퉁 한국일보’ 발행을 돕는 일부 서울경제 간부들을 규탄하고 있는 모습. 이치열 기자 truth710@
 
어느 날부터 인사동에서 광화문으로 넘어가는 길 왼쪽에 한국일보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그 얼마 뒤에 초현대식 곡선 디자인의 건물이 그 자리에서 보였다. 신문사 건물로는 너무 요란하다 생각했다. 마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부장이라는 호칭에 님이라는 불필요하고 장식적인 존칭 수사가 들어간 것처럼. 나중에 듣고 보니 그 건물은 한국일보 건물이 아니었다. 한국일보는 중학동이 아닌 어디 다른 곳, 을지로인가 어디, 여하튼 중학동이 아닌 곳으로 건물을 세 들어 옮겼다고 했다. 일간스포츠는 아예 다른 신문사 계열사로 팔렸다고 했다. 백상이라는 창업자의 호가 들어있는 시상식이 다른 신문사에서 벌어지는, 내게는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더니 끝내 한국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강제로 끌려나왔다. 새파란 용역들이 편집국의 문을 지켰다. 기자들이 있던 곳, 한 때는 신문사의 경영진들도 어려워서 조심스럽게 들어 왔다던 그 편집국에서 기자들이 용역들에 끌려 나왔다. 내 52기 동기 오미환 기자도 그 끌려나온 기자들 속에 있었다. 1990년에 입사했으니 24년째 그 편집국에서 기사를 써 온 미환이가 사진 속에서 용역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미 대부분의 부장들보다도 선배인 그녀가 후배 기자들을 이끌며 싸움의 전면에 나서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문명의 세상에서 24년차 여기자가 완력으로 편집국에서 내몰리는 일이 가능할까? 사진을 보고 오싹했다.

수많은 기자들이 한국일보를 떠났다. 한때 기자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기자 훈련을 잘 시키기로 유명한 한국일보였다. 형편이 더 좋은 신문사로, 방송사로, 신생 신문사로, 아니면 대기업으로, 모두 더 나은 보수와 여건을 찾아 떠났다. 떠난 자들이 남은 자들보다 더 많았지만 그래도 남은 자들은 굳건히 한국일보를 지켰다. 스스로 영입한 칼럼 필자에게 원고료를 독촉 받는, 기자로서 감당키 힘든 굴욕 속에서도 그들은 편집국을 지켰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기자라는 직함은 아니었다. 물론 빈약한 보수도 아니었을 것이다. 신문사의 이념도 기자로서의 사명감도 어쩌면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건 한국일보라는 제호였다. 자신들이 청춘을 바쳐서 만든, 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지켜온 제호였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호가 훼손되는 일은 막아야 했다. 제호가 훼손되는 일은 자신들의 삶의 가장 큰 부분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한 사회가 오랜 시간 사회적 비용을 들이며 만들어 온 어떤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부실한 경영과 끊임없이 타협하고 양보해 왔던 것이다. 회사와의 극단적인 대립 속에서도 오히려 더욱 열심히 신문을 만들어 왔던 것이다. 그렇게 지켜온 제호가 기자들의 편집국 퇴출이라는,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일로 심하게 훼손된 것이 지금 한국일보의 현실이다.

한 사업체로서의 신문사는 사주의 소유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제호는 수십 년 간 매일 나가서 취재하고 글을 쓰면서 그 제호의 가치를 만들고 지켜 온 기자들의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일보는 용역들이 지키고 있는 그 뒤, 대부분의 기자들이 강제로 떠나야 했던 그 방, 한때는 편집국이라 불렸던 그 방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한국일보는 용역들과 맞선 기자들이 밤을 새워 지키는 그 복도의 맨 바닥 위에 있다. 기재들이 있는 곳이 아니라 기자들이 있는 곳이 진정한 편집국이지 않겠는가? 훼손된 한국일보의 제호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첫 걸음도 그 차가운 맨 바닥 위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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