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기자들은 왜 사주인 루퍼트 머독에게 등을 돌렸을까? 영국 언론계가 이 문제로 떠들썩하다. 머독이 지난 3월 <선> 편집국 주요 간부들과 가진 간담회 녹취록이 4일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가 비공개로 가진 간담회 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돼 공개됐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다.

미디어 황제 루퍼드 머독은 지난 3월 6일 <선> 편집국에서 전현직 주요 간부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선>의 사내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머독이 직접 나선 자리였다. <선>의 전현직 기자와 간부 20여 명이 경찰과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정보를 얻은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고 기소 상태에 있었다. 이들의 ‘범죄행위’를 규탄하는 비난여론도 비등했다.

<선>, 돈 준 자료 경찰에 넘겨 기자 20여명 기소돼

   
▲ 루퍼트 머독의 이혼 소송을 보도한 6월 17일자 <선> 인터넷판 기사
 
이날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경찰에 체포돼 수사를 받고 기소된 기자들에 대한 지원 등 사후 처리 문제. 둘째는 왜 회사가 경찰에 기자들이 돈을 준 자료 등을 제공했느냐는 것이었다. 기자들이 회사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던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머독은 역시 노회했다. 한편으론 분노한 기자들을 달래면서, 그 분노를 ‘복수’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 그는 기소된 기자들이 유죄판결을 받더라도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해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건강보험’에 대한 지원은 물론 공개적으로 약속할 순 없지만 ‘취업’ 문제도 “나를 믿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경찰이 <선>과 기자들에게 저지른 ‘만행’을 고발하면서 “때가 되면 되갚아주자”고 복수를 다짐했다. 경찰 수사에 협조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2년 전 청문회 때와 다른 발언도 쏟아냈다. 경찰들이 무리하게 기자들을 체포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또 정보를 얻기 위해 경찰 등에게 돈을 주어온 것은 영국 언론계에선 100년 넘게 오래된 관행이라고 강변했다. <선>을 인수했을 때 편집국에 ‘정보력 있는 취재원’을 접대할 때 사용하기 위해 현금을 넣어 두는 금고가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오래 전부터 취재원들에게 금품을 제공해온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묵인했다는 발언인 셈이다. 청문회 때 “자신은 전혀 몰랐다”는 증언과는 정면으로 배치된다.

전현직 간부와 기자 20여 명이 사법 처리 위기에 몰려 있는 <선> 편집국의 살벌한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머독은 나름 성의를 보이면서 ‘복수’의 대열에 기자들을 묶어세우려 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회사에 대한 기자들의 배신감을 말끔히 해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의 배신감을 더 확실하게 굳혀준 간담회가 됐다는 풀이까지 나온다.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은 기자들은 회사 변호사들의 요청으로 자신들이 제출했던 자료들이 바로 체포영장의 근거가 된 것을 보고 경악했다. 전화 해킹 사건 등에 대한 법적 대응에 나서고 있던 회사의 변호사들이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상황이 전개됐는지를 알아야 한다면서 기자들에게 요청한 자료였다. 기자들이 금품을 제공한 사례와 증빙자료, 취재 기록 등을 모두 제출했다. 회사 변호사들은 어디까지나 법적 대응을 위한 내부용이라고 말했지만, 이들 자료와 기록은 고스란히 검찰과 법원에 제출됐다. 당연히 ‘머독과의 대화’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이었다.

“머독 경찰에 기자·취재원 팔았다”

“레비슨 청문회에서 어떤 이는 취재원을 보호하는 것은 모든 저널리스트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라고 말해놓고는 경찰에 <선>의 모든 취재원과 그들과의 접촉 기록, 그리고 영수증까지를 기꺼이 제출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을…”

머독 앞에서 <선> 편집국을 대표해 읽은 공개서한 내용 가운데 일부다. 이 서한에서 말하는 청문회에 참석한 어떤 이는 바로 루퍼드 머독이다. 머독에게 대놓고 ‘직답’을 요구한 것이다. <선> 구성원들의 배신감이 어느 정도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머독은 당시 패닉 상황이었으며, 그런 점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묻는다면 전혀 없다고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경찰의 자료 요구에 회사가 아무 저항 없이 응한 적은 없으며 ‘법원의 명령’ 없이는 응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런 군색한 해명은 당장 구속 위기에 몰려 있는 <선>의 기자들에게는 별 설득력을 갖지 못했던 것 같다. 머독의 간담회 내용은 간담회 직후부터 공공연히 외부로 흘러나왔다. 과거에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선>의 기자들은 다른 언론사 동료 기자들에게 “매일 밤 악몽을 꾸고 있다”면서 “자신들이 머독과 그의 회사를 살리기 위해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는 것. 이번에 간담회 녹음 내용이 전격 공개된 것은 머독의 미디어제국 내부에서부터의 균열이 상당히 심각함을 드러내는 단적인 징후라 할 만 하다.

<선>의 일요판으로 폐간된 <뉴스오브더월드(NoW)>의 전화 해킹 피해자들의 모임인 해크오프(HackOff)는 머독이 경찰 등에 대한 뇌물 제공 행위를 오래 전부터 알고도 이를 묵인하거나 방치해온 사실이 드러난 만큼 그에 대한 사법처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뇌물공여 혐의 등으로 기소된 <선>의 전현직 기자들 역시 머독의 발언을 통해 확인된 것처럼 자신들은 언론의 오래된 ‘관행’과 회사의 ‘방침’에 따른 희생양일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머독의 반응은 어떨까. 머독의 영국 신문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뉴스UK’ 대변인은 “머독은 <선> 기자들이 경찰 등에 금품을 제공한 사실을 ‘뉴스 코퍼레이션’이 경찰 당국에 알릴 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그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말한 바도 없다”고 밝혔다. 머독이 또 <선> 기자들이 유죄판결 등과 관련해 한 말은 단지 “심정적 위로 차원에서 한 말”이라고 해명했다.

한 때는 영국 최대의 발행부수와 그 정치적 영향력을 두고 의기투합했던 머독과 그 기자들이다. 이 때문에 기소된 <선> 기자들이 자신들을 ‘희생양’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 대해 이제 와서 무슨 소리냐는 냉소적인 시각도 있다. 어쨌든 그동안 철옹성 같았던 머독의 미디어 제국이 안에서부터 처음으로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전개가 주목된다.

머독의 뉴스코프는 6월 28일 신문․출판을 부문인 ‘뉴스코프’와 영화와 TV 미디어 부문인 ‘21세기폭스’로 분리됐다. 머독은 두 회사의 회장직과 함께 21세기폭스의 최고경영자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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