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죽이기’를 통해 언론과 지식인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방과)가 최근 ‘김영삼 이데올로기’란 새 책을 집필 완료했다. 이 책에서 그는 ‘승리 이데올로기’라는 다소 낮선 개념을 김대통령의 통치 스타일과 정치적 역정을 분석하는 가운데 추출해 내고 있으며 이것이 김대통령의 개혁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임을 지적하고 있다.

승리 이데올로기를 굳이 해석하자면 ‘역사는 승리자만을 기억’하므로 자신의 승리가 모든 가치의 우위에 선다는 이데올로기 아닌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교수 자신이 결코 맹목적인 김대통령 비판자가 아니며 진정으로 김대통령을 위해, 한국정치의 미래를 위해 이 글을 썼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는 또 이 책이 김영삼이란 프리즘을 통해 언론과 지식인들을 재차 비판하고 있고 한국 민주주의의 실체를 구명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김대중 죽이기’의 속편임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의 후반부엔 ‘김대중 죽이기’ 반론에 대한 재반론과 김씨의 정계복귀에 대한 견해도 아울러 싣고 있어 두 김씨의 ‘끝나지 않은 전쟁’을 통해 본 한국정치의 딜레마를 실감케 하고 있다. 그는 과연 어떤 ‘병인’을 들어 김영삼 정부와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을 하려는 것일까. 21일 발행 예정인 그의 책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김영삼의 승리이데올로기

나는 김영삼보다 김대중이 집권하기를 바랐던 사람이지만 김영삼도 왕년의 민주투사일진대 그를 돕는 건 옳은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지지한 글을 여기저기 많이도 썼다. 그러나 이제 나는 실망을 넘어 절망하고 있다. 김영삼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다. ‘승리’라는 동물적 본능일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 영광이 돌아올 경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개혁적인 면모를 보이는 반면 자신이 빛나지 않을 경우,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반개혁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자신의 승리를 위해선 얼마든지 반개혁적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말이다. 개혁도 그에겐 승리를 위한 도구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의 승리에 대한 집착이 단순한 욕심을 뛰어넘어 자신의 승리욕을 선과 정외에 직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자신에게 그런 게 있는지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에게 국민의 비판여론은 ‘고마움을 모르는 괘씸한 처사’일 뿐이다.

그는 또 승리에 대해 ‘동물적 본능’을 가진 만큼 사상과 철학, 논리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통일민주당시절부터 그와 회의를 해본 한의원은 “회의를 제대로 주재하지 못할 정도였다. YS는 토론 분위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결론을 내리곤 했다. 회의가 길어지거나 이의를 제기하면 ‘씰데 없는 소리’라고 서둘러 종결해 버렸다”고 밝힌다.

이미 그의 자질과 관련, 그가 ‘머리가 없는 사람’이란 사실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문이나 TV에 등장하는 그의 사진은 언제나 ‘고뇌와 사색’에 잠겨 있는 표정이다. 청와대 홍보팀도 그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승리이데올로기가 논리를 ‘귀찮게 따지는 것’정도로 없이 여기고 의리와 인정을 앞세우는 정치 풍토 속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되는데 ‘지상의 고뇌와 사색’은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 어떤 유권자도 그 어떤 지식인도 그런 면을 문제삼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정작 지금부터의 문제는 그의 승리 이데올로기가 국정 곳곳에서 부작용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비근한 예로 6.27 지자체 선거를 정당공천을 배제하고 실시하고자 주장하는 등 승리를 위해서라면 여야합의에 의한 법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는 “몇 백명이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선거를 깨끗하고 철저하게 차질없이 치를 것”이라고 말해놓고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각종 선심행정을 남발해 중앙선관위의 지적을 받는 웃지 못할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는 깜짝쇼 정치, 세계화 등 구호성 정책의 남발, 친재벌 정책, 노선없는 통일정책 등의 뿌리엔 어김없이 승리 이데올로기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김영삼은 또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승리 이데올로기’도 그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독선적인 성향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여기엔 또 하나의 신화가 존재한다. 그가 자기 말보다 남의 말을 더 잘 듣는 사람이라는 평가다. 이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김대중과 비교돼 그가 훨씬 민주적이라는 평판까지 낳게 됐다. 그가 남의 말을 잘 듣기는 한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다른데 있다. 그의 소신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라 본능적이다. 남의 말을 듣기는 해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김영삼의 정치형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자기도취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는 외국에만 나갔다 오면 꼭 굵직한 말을 한마디하는데 국민이 듣기엔 외국 바람이 들어 불거져 나온 허황된 정치 구호일망정 그는 매번 진지하고 심각하다. 그의 자기도취는 지금 불필요한 오만과 독선으로 변질되고 있다.

김영삼과 언론

오늘날의 김영삼을 키워준 것은 언론이다. 언론의 권력에 대한 ‘탐욕’과 김영삼에 대한 ‘의리’는 그의 자질을 은폐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물론 언론의 ‘김영삼 키워주기’는 그의 승리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는 한국사회에서 정치인이 성공하기 위해선 ‘사람장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철저하게 깨닫고 실천한 인물이다.

기자들에 대한 그의 선심과 대접은 기자들을 ‘깜빡 넘어가게’만든다. 게다가 그가 집권한 이후 권력에 아첨하는 근성이 뼛속 깊이 배어있는 언론의 자발적인 충성도 큰 힘이 됐다. 언론은 이제 그의 ‘오빠부대’로 전락했다.

언론이 저지른 아첨의 실상은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다. KBS의 경우 ‘땡전’ ‘땡노’에 이어 ‘땡김뉴스’를 부활시켰다. MBC는 그의 집권 2년을 기념하는 특집 ‘큰 개혁, 큰 변화’를 통해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아첨을 해댔다.

특히 그가 APEC회의에 참석할 때 언론은 대규모의 기자단을 파견해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그럴싸하게 포장해 그의 국제적 리더십에 대해 민망할 정도의 극찬을 해댔다.신문들은 APEC지도자회의에서 그가 의장인 클린턴 바로 옆에 앉았다는 것을 시종 강조했으며 줄곧 회의를 했다고 보도했다.

제목도 <김대통령 역할 시종 돋보여> <김대통령 총평으로 회담 마무리> 등으로 뽑았다. 영어도 잘못하는 그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를 클린턴이 벌이는 ‘원맨쇼’의 들러리 정도로 여겼다는 미국 언론의 보도는 전혀 감안하지 않았던 것일까.

유럽순방 중 프랑스 방문 때 한국기자가 1백40명이란 사실에 대해 프랑스 기자들이 경악을 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 해외순방 때 수행기자는 20여명 안팎이었기 때문이었다. 코펜하겐의 ‘유엔 사회개발 정상회의’에서도 다른 나라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한국 취재진 1백40명은 미국의 30여명, 일본의 20여명, 프랑스의 10여명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규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은 비정하다. 기회주의적이다. 김영삼은 언젠가 언론에 의해 발가벗겨질는지도 모른다. 그와 청와대의 교묘한 언론 통제도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다. 언론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해놓고 이를 공개하지 않고 언론 통제의 무기로 삼고 있다.

<미디어 오늘>창간호에 따르면 안기부 언론대책팀이 아직도 정보수집과 보도조정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원종 정무수석이 예민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방송사와 신문사에 전화를 해 보도통제를 하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정의롭다는 승리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언론이 호외적으로 대서특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한 청와대 출입기자의 푸념을 들어보자. “비서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쓰고 싶어도 청와대 측에서 이상한 반응이 나올까 걱정되기도 하고 회상에서도 괜한 긴장관계를 만들지 말라고 주문을 해오고 있다”

끝으로 그와 조선일보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일보는 개혁적 정부각료, 북한 벌목공 문제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조선일보는 그들이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의 주역이라는 자부심과 책임감 때문에 정부정책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현실적이고 구체적 비판을 해왔다. 국민의 입장에선 그가 저지른 과오가 많았던 만큼 조선일보의 비판이 늘 반개혁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의 개혁정치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의 굴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언론은 그들의 이해관계와 상충되지 않을 때는 낯뜨거운 아첨도 불사하며 그를 미화한다. 그러나 바로 이런 언론의 ‘과보호’가 그를 망치고 있다. 근 언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쪽으로 개혁의 방향을 틀어 개악으로 치닫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김대중 죽이기>에 대한 반론-재반론

정치평론가 황광우는 <사회평론 길>에 ‘김대중 죽이기’에 대한 반론을 기고했다. 그는 반론에서 “지역감정 때문에 민주주의가 실종돼버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모독”이며 “김대중의 대선 패배 원인을 지역감정에서 찾기 시작하면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 국민에 대한 혐오와 정치에 대한 좌절뿐이며 거기에선 희망이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광우는 지역감정에 관한 ‘진실규명’을 외면하고 그 책임을 김대중에게 돌리는 기가 막힌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준다. 김대중을 제물로 삼으면 문제는 간단히 풀린다. 이게 바로 ‘김대중 죽이기’라는 정치적 편의주의다.

그는 또 내가 지역차별은 오직 호남출신의 정치가가 대통령이 돼야만 풀릴 가망이 있는 문제다라는 처방전을 내렸으며 이같은 처방전은 결국 호남사람들이 호남공화국으로 독립하는 길만이 가장 합리적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런 용기가 없을 때, 강준만식 각설이 타령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렇게 나의 주장을 거론하는데도 의도적 진실왜곡을 하고 있다. 나는 ‘김대중 죽이기’에서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김대중을 당선시켜야 했다는 이태영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했다.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서 지역감정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은 김대중 죽이기와 마찬가지로 진실을 무시하는 정치편의주의이기 때문이다.

또 그는 언론의 영향력을 독자수 정도로 파악해 ‘김대중 죽이기’에 앞장 선 언론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에 가까운 주장을 하고 있다. 성공회대 교수 조희연은 ‘도덕완벽주의’라는 이중 잣대로 김대중을 죽이고 있다.

도덕완벽주의는 묘하게도 김대중에게만 적용될 뿐 정부여당에 대해선 법을 지키라는 말도 잘하지 않는다.
그는 지배지반의 김대중 죽이기에 대해 “논리적 반박보다 더욱 높은 도덕성과 헌신성으로 헤쳐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는 논리적 반박을 아예 하지 않을 경우 ‘도덕성과 헌신성으로 헤쳐나가되, 더욱 치열한 논리적 반박을 가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앞서 황광우의 언론에 대한 무지처럼 그는 조선일보의 반 호남정서를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반 호남정서는 다름 아닌 시장논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

김대중 정계복귀에 관해

‘김대중 죽이기’는 사실 김대중에게 제발 정계복귀를 하지 말아달라는 주문이었다. 내가 그의 정계복귀를 반대하는 것은 요즘 언론들이 떠들어대고 있듯이 그가 국민과 함께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지금 대권에 도전한다고 해도 ‘김대중 죽이기’가 사라진 공정한 ‘게임의 룰’이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요즘 정계복귀를 둘러싸고 연일 공격의 화살을 퍼붓고 있는 언론과 지식인들에 대해 이런 말을 해야겠다. 김대중은 한번도 공정한 게임의 풀 속에서 싸워본 적이 없는 정치인이다. 그러나 언제 언론과 지식인들이 게임의 물을 문제삼았던가.

그들은 선거가 어떻게 치러졌건 ‘여당 프리미엄’으로 모든 걸 설명했다. 김대중에게도 피해자의 ‘프리미엄’을 주자면 그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 그들은 헌법을 유린하는 폭거를 저지른 독재자나 그들과 손잡고 정권을 창출한 김영삼보다 더 김대중을 꾸짖는다. 이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논법이다.

그래서 김대중은 억울하다. 만약 김대중의 억울함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그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건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이 극도로 왜곡돼 있는 가운데 공정한 심판이 존재하지 않는 한국 민주주의 체제 운영의 문제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