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코끼리를 생각하게 된다. 프레임을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 프레임을 떠올려야 한다. 미국 로크리지연구소의 조지 레이코프 연구원이 쓴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다. 최근 국가정보원 관련 이슈에서도 이런 흐름이 나타난다. 국정원 선거 개입 이슈가 들끓고 있는데 갑자기 NLL(북방한계선) 논란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모두가 NLL 이야기만 하게 됐다.

미디어오늘이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24일까지 30일 동안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3대 보수성향 신문들과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5개 전국 단위 종합일간지의 국정원 관련 보도를 집계해 분석한 결과 원씨가 불구속 기소된 11일과 경찰 사이버수사대 폐쇄회로 화면이 공개된 14일을 전후로 원씨 관련 보도가 쏟아졌으나 20일 국정원이 NLL 대화록 발췌본을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공개하면서 NLL 관련 보도가 원씨 관련 보도를 뒤덮은 것으로 나타났다.

원세훈씨가 불구속 기소됐던 다음날인 지난 12일에는 5개 일간지에서 26건의 기사가 쏟아졌다. 경찰 CCTV 화면이 공개된 다음날인 15일에도 27건의 기사가 쏟아졌다. 이어 17일과 18일, 19일까지만 해도 15건, 14건, 10건씩 기사가 쏟아져 나오면서 원세훈 이슈가 살아있었다. 그러나 20일 NLL 이슈가 터져나오면서 원세훈 기사가 사라졌다. 21일 하루 동안 21건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22일과 24일에는 38건, 32건씩으로 지면을 도배하다시피했다.

   
 
 
지난 한 달 동안 5개 일간지에 실린 기사 건수는 원세훈 관련 기사가 207건, NLL 관련 기사가 127건으로 원세훈 이슈가 더 많았지만 NLL 이슈가 훨씬 더 확산 속도가 빠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최근 1주일 동안 놓고 보면 원세훈 관련 기사는 40건에 그친 반면, NLL 관련 기사는 102건이나 됐다. 대학생들 시국 선언이 잇따르고 촛불집회도 확산되고 있지만 원세훈 관련 이슈는 이미 신문 지면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기사 건수 뿐만 아니라 지면 분량에서도 NLL 이슈가 원세훈 이슈를 압도했다. 334건의 관련 기사를 분석한 결과 6월24일 하루 동안 5개 신문 지면에 등장한 NLL 관련 기사는 1만3762㎠에 이른다. 20일부터 4일치 신문에 실린 NLL 관련 기사가 3만6096㎠, 지난 10일치 신문에 실린 원세훈 관련 기사 2만9523㎠를 압도한다. 둘 다 국정원 이슈지만 NLL이 원세훈 이슈를 잠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는지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 시점에서 국정원이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대화록 발췌본을 흘렸느냐다.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대통령 지정 기록물이냐 아니냐, 발췌본을 공개하는 게 불법이냐 아니냐를 따지기 시작하는 순간 원세훈 이슈는 사라지고 NLL만 남게 된다. 24일 신문 지면을 보면 국정원과 조중동의 프레임 전략이 제대로 먹혀들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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