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정작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을 규정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가장 중요하게 실현시켜내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인간(그러니까, 소비자)을 바라보는” 산업의 밑천이라면, 굳이 인문학적 상상이 아니라도 기술적으로 관찰하고 설계할 수 있다. 더 정밀하고 철저한 취향 조사와 테스트 과정 같은 것 말이다. 학문적인 성과를 노린다면, 대중 보편으로 파고든 ‘상상력’보다 당장 더 중요한 것은 깊숙한 공부 및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학제 개편 및 연구지원이다. ‘힐링’이나 자기계발이라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그냥 적당히 달콤한 조어들과 단순한 감동구조의 활용으로도 엇비슷하게 해낼 수 있다(예전에 필자는 그 소재로 이런 농담을 한 바 있다: http://capcold.net/blog/9415 ).
그보다 인문학적 상상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통해서 개인적 및 사회적 삶의 여러 측면을 자극하는 동기 부여 그 자체를 누구나 해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산업적 도구와 인생의 결론이 아니라, 보람을 찾는 동기와 질문하는 과정이다. 남이 상상해서 낸 결론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상상하는 과정을 같이 겪어보며 내 길을 성찰해보는 것 말이다. 이런 것은 무거운 철학적 명저들을 가지고 그렇게 하기에는 아무래도 진입장벽이 높기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방식이 적합하다.
이런 식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무슨 창조경제의(이 연재칼럼의 이전 회에서 언급했듯, 매우 꽁기꽁기한 조어다) 원동력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다만 굳이 연결하자면, 이런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자신과 사회의 삶을 돌아보고, 사회과학적 구체성으로 더 스트레스 덜 받고 잉여로운 사회를 만드는 개혁을 해나가며, 자연과학의 엄밀한 지식 체계와 공학의 성과들을 그 과정에서 적극 활용해 나아간다면 사회 발전과정 전체의 한 요인이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따로 키워드로 천만번 강조하지 않아도 ‘창조’가 열리고 그 중 일부는 ‘경제’로도 유입되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