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진의 공을 눈감고 쳤다”는 뉴욕 양키스 이치로 선수의 발언은 국내 언론의 오보로 밝혀졌다. 일부 언론이 뉴욕 양키스 구단에 소개된 이치로의 발언을 맥락 없이 직역하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던 것. 일각에선 ‘한일 대결’이라는 코드에 집착한 국내 언론의 과도한 국수주의가 빚은 오버라는 지적도 나온다.

뉴욕 양키스 이치로 선수는 지난 20일(한국시각) 열린 ‘2013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홈경기에서 6번 타자로 선발출장 했다. 이날 이치로는 솔로 홈런을 포함해 맹활약했다. 양키스의 6대4 승리를 사실상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경기가 끝난 이후 양키스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치로의 발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불거졌다. 이치로는 경기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난 어떤 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다. 솔직히 말해 그냥 과감하게 쳤다”고 말했는데, 이 발언이 마치 류현진의 공을 눈감고 쳤다는 식으로 비화돼 논란이 확산된 것.

‘과감하게 쳤다’가 ‘눈 감고 쳤다’로 잘못 번역… 류현진, 특정해서 언급 안 해 

하지만 이치로의 발언은 이날 경기에 대한 전반적인 소감에 관한 내용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치로의 발언은 “To be honest, I just closed my eyes and swung”이었다. 이를 직역하면 ‘눈을 감았다’로 번역이 되지만, 의역을 하면 ‘그냥 과감하게 휘둘렀다’는 뜻이 된다. 발언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자신은 평소대로 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6월20일 위키트리 사이트 화면캡처
 

하지만 이치로의 발언은 일부 국내 언론에 의해 류현진의 공을 ‘눈감고도 칠 수 있는 공’이라고 보도됐다. 이치로의 과거 ‘30년 발언’까지 언급되면서 망언 논란으로까지 확산됐다. <역시 ‘입치료’, 이치로 “류현진공 눈감고 홈런쳤다”>(헤럴드경제) <이치로 “눈 감고 스윙했다” 인터뷰 논란>(위키트리)을 비롯해 많은 언론들이 이치로의 발언을 ‘망언’에 비중을 실어 보도했다.

초반에 ‘류현진 비하’ 쪽에 비중을 실어 보도한 언론들은 이후 번역 논란이 불거지자 일제히 보도태도를 ‘번역 논란’ 쪽으로 바꿨다. 미디어오늘이 21일 오전 관련 기사를 검색한 결과, 대다수 언론이 초반 ‘망언 논란’으로 송고한 기사를 삭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치로는 지난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도 ‘망언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당시 WBC 대회 전 이치로는 “앞으로 일본과 경기하는 나라들이 30년은 이길 수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확실하게 이기고 싶다”고 발언했는데, 이 발언이 한국을 겨냥한 것으로 보도가 되면서 파문이 확산된 것.

하지만 당시 이치로의 발언은 ‘모든 나라들을 압도하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시 파문 이후 국내 야구팬들 사이에서 ‘이치로=입치료’라는 악명이 붙기도 했다. 일부 언론의 잘못된 보도가 빚어낸 오해였던 것.

“기자들, 원문만 제대로 확인했어도 오보 막았다”

이번 파문과 관련,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기자들이 원문을 확인하지 않고 기사를 작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최동호 평론가는 “‘이치로 발언’과 관련해 1보가 나간 이후 기자들이 원문만 제대로 확인했어도 ‘망언 오보’ 논란은 피할 수 있었다”면서 “기본적인 사실 확인 없이 타 언론사 보도를 약간 수정해서 보도하면서 ‘망언 논란’이 확산됐다”고 비판했다.

   
6월20일 헤럴드경제 사이트 화면캡처
 

‘한일 대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내 언론의 보도태도가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언론이 기본적으로 ‘한일 대결’이라는 코드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심할 경우 국수주의 코드마저 보인다는 것. 그러다보니 언론은 한일대결은 반드시 이겨야 할 경기라는 전제를 깔아버린다.

이번에 이치로의 발언 가운데 일부분만을 이용해 부정적으로 확대 부각시킨 것도 이런 코드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지적이다. 차분한 경기분석은 뒷전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해외에 진출한 국내 선수들 관련 보도에 있어 가장 잘 팔리는 구도가 바로 대립구도”라면서 “이번 뉴욕 양키스와 LA다저스 경기에서도 경기시작 전부터 많은 언론들이 ‘한일 대결구도’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고 지적했다.

최 평론가는 “이번에 이치로 발언의 경우에도 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들이 이른바 ‘뉴스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면서 “매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점점 언론들이 선정적이고 상업적인 뉴스 쪽으로 쏠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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