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보수언론이 촉발한 ‘역사왜곡’ 논란과 이승만 전 대통령 유족 측의 고소에 까지 이른 영화 <백년전쟁>에 대해 이를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면 반박에 나서 대한민국 현대사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역사전쟁이 시작됐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는 9일 오전 서울 중구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과 관련해 최근 보수진영의 ‘역사전쟁’에 맞서 첫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연구소의 입장과 대응방향을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작년 11월 첫 편을 선보인 역사다큐 ‘백년전쟁’ 시리즈 제작은 거대한 역사왜곡에 맞서 정직한 역사를 지키기 위한 연구소 나름의 작은 몸부림이었다”며 “그런데 박 정권이 들어선 뒤인 지난 3월 13일 청와대 원로 회동을 계기로 느닷없이 연구소에 대한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음해가 시작됐고 족벌언론과 극우단체, 친일독재세력의 후손들이 주축이 돼 여기에 청와대와 정부기관, 여당 국회의원까지 가세하며 마녀사냥식 난도질을 자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구소는 보수 세력과 이 전 대통령 유족의 고소 등에 대해 “이승만, 박정희 추종세력들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이기 때문”이라며 “국민들의 성금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 독립전쟁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전파하고 있는 연구소야말로 그들에게 최대의 장애이며 따라서 우선적으로 타도해야 할 대상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
 
연구소는 이와 함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영화 ‘백년전쟁’을 두고 불거진 9가지 쟁점에 대해 사료를 들어 반박했다.

이승만포럼(공동대표 인보길·이주영)과 이승만연구원(원장 류석춘)에서 제기한 이승만과 여대생 김노디가 맨 법(MANN ACT·부도덕한 성관계를 목적으로 여자를 데리고 주 경계선을 넘는 것을 금지)으로 무고하게 고발당했고, 불륜 관계가 아니었다는 주장에 대해 연구소는 “이승만과 김노디의 관계를 불륜이라고 한 적이 없다”며 “백년전쟁은 샌프란시스코 감독관이 이승만의 위반 사실에 대한 조사와 함께 추방절차에 돌입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린 점에서 법적 절차에 착수한 것으로 파악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을 용의자 사진으로 합성한 것에 대해 연구소는 “1920년대 시기 두 사람의 사진을 합성해 만든 패러디물로 단지 풍자를 위한 표현기법일 뿐”이라며 “일종의 포토 몽타주로 메시지를 쉽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라고 밝혔다.

영화를 제작한 김지영 감독도(46)은 9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그게 문제라면 우리나라에서 공인에 대해서 패러디하는 신문 만평은 다 걸린다”며 “창작의 자유를 억압해선 안 된다는 법원 판례들이 있는데, 유족 입장에선 혹독하다 느꼈어도 공익에 부합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되면 이를 감수 하고 창작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감독은 이승만포럼 측에서 제작한 ‘생명의 길’ 영상에 대해서도 반박 영상을 준비 중이다.

연구소는 또 이승만의 대일관을 친일로 오해했다는 주장에 대해선 “호놀룰루 스타블러틴지의 기사는 ‘이승만이 반일교육자다’라는 보도에 대한 이승만의 반박 기사로 ‘우리 학교에서는 일본을 비판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반일 감정을 일으킬 생각이 없다’라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1912년 11월 18일자 ‘워싱턴 포스트’지에 이 같은 기사가 없으며 조작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연구소는 이 자리에서 관련 기사를 반박 자료로 제시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
 
연구소는 청와대 원로 초청 오찬 이후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의 정부 측 대응 방침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연구소는 “특히 국가안보 차원의 대처를 주문한 청와대의 원로회동 이후 이 같은 양상은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광기마저 띠고 있다”며 “민간이 제작한 역사다큐를 둘러싸고, 청와대가 정부 산하 기관장들을 불러 대처를 지시하고, 여당 국회의원이 압력용 대정부 질의를 하고, 이를 방영한 R-TV를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회부하는 등 지금이 이승만 시대인지 박정희 유신시대인지 헷갈리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청와대 수석실에서 국사편찬위원장 등 정부 산하 역사단체장들을 불러 대처를 지시한다든지, 안행부 장관과 총리가 대정부 질의에서 대응하겠다고 답변한 것은 대단히 문제”라며 “시민의 학술·문화·예술 등 자유로운 활동을 위축시키려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자 사실상 정권의 탄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한국역사연구회(회장 하일식), 역사문제연구소(소장 김동춘) 등 5개 역사단체들은 ‘백년전쟁 고소사건에 대한 역사단체 공동성명’을 내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족이 사자(死者)명예훼손 혐의로 민족문제연구소를 검찰에 고소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밝혔다.  

하일식 한국역사연구회장은 “대중을 대상으로 한 영상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범위에서 일상적인 표현을 쓰거나 강조하려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더러 있고, 이는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라며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는 이미 그 개인의 인격을 떠나 ‘역사적 해석’의 차원에 들어선지 오래로 비학문적 비난을 가하고 심지어는 색깔론으로 몰아붙이는 행태는 자제돼야 하며 더욱이 권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부당하게 개입하려는 시도가 있어서도 안 된다”고 비판했다.

연구소는 기자회견 이후 이승만 유족 측의 고소에 대해 연구소 고문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과 함께 대규모 변호인단을 결성해 법적 대응도 불사하겠다는 방침이다. 조세열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은 “시민에게도 현재의 연구소에 대한 공격 상황이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인지 알려 나가려고 한다”며 “이 같은 대응과 별개로 남은 시리즈물 기획도 연 2편 제작을 목표로 계획대로 차분히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측은 법정 소송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다. 김일주 이승만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은 9일 “별도의 재반박 기자회견 없이 법정에서 다툴 것”이라며 “연구소 측도 복잡하게 표현·언론출판·학문의 자유를 논하기 전에 구체적으로 콕 집어서 사자 명예훼손 대해 집중해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김 총장은 이승만의 ‘맨 법’ 위반에 대해선 “우연히 노디 손(남편 성이 손씨라는 주장)과 기차를 같이 타고 주 경계선을 넘어간 것은 맞다”면서도 “당시 그 법은 악법이라고 해서 폐지됐으며 이승만뿐만 아니라 많은 인사들이 그 법으로 고초를 겪었다”고 설명했다.

김 총장은 정부 쪽 협조가 있었던 것이냐는 의문에 대해 “정부는 이 문제를 다룰 자격도 안 되고 해서도, 할 수도 없다”며 “정부가 국가 정통성과 국기 문란에 대해 당연히 얘기할 순 있지만 청와대에서 개입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고 밝혔다. 

   
역사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과 관련해 보수층 등의 비난에 맞서 제작자인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9일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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