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5일 금요일 8시,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에서 2013년 ‘라이징스타(RISING STAR)’ 현대무용 공연을 봤다. 한국공연예술센터(Hanpat)가 현대무용계의 발전을 위해 내놓은 프로그램이었다. 

최수진(29) 안무, 출연의 공연제목 ‘아웃 오브 마인드 out of mind’에서 보여준 최수진의 ‘춤’은 이제 막 스물아홉 인생을 산 ‘춤꾼 최수진의 마음의 춤’(spritual dance)을 자신을 포함 6명의 무용수들과 함께 보여준 무대였다.

자신의 ‘마음’을 춤으로 드러내어 비춘다는 건 어려운 주제다. 타인(他人)하고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마음’의 무늬들, 감정들, 다른 사람과 상관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정황에서의 정서적 심리적인 변화들, 속마음과 겉마음으로부터의 떠남이고 벗어남인 ‘out of mind’인가?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부터도 제대로 벗어나고픈 ‘마음’인가? 본능을 말함인가? 아니면? 의식(意識)의 자유(自由)? 또는 무의식으로부터 행해지는 행위? 철학적인 주제였다.

   
New York Times- DANCE REVIEW | CEDAR LAKE CONTEMPORARY BALLET, left, Soojin Choi, “Frame of view.”
 
   
Cedarlake with Jubai battisti.
 
그러나 춤꾼이 ‘춤’을 추는 이유에는 ‘자유에의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자아(自我)의 신장(伸張)과 발현(發顯)에 춤을 추는 마음의 바탕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같은 의미로 ‘마음’을 말하고, 모두 같은 방식으로 ‘꿈’을 말할 수는 없다. 최수진은 ‘춤’으로 자신이 살아온 스물아홉의 인생을 말하고 ‘마음’을 말하고 ‘꿈’을 말하고 있었다.

무대는 어두웠다. 어둠 속에서 무용수들은 최수진 안무에 최수진과 같이 숨차게 뛰고 또 뛰었다.

삶이란 흐르는 강이다. 그 강물의 흐름을 결코 멈추게 할 수는 없다는 의지를 ‘춤’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스물아홉 살 춤꾼의 삶이란, 그동안 살면서 자기가 치룬 삶을 몇 마디 간소한 문장으로는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낯선 도시 뉴욕으로 날아가 야생마(野生馬)처럼 ‘춤’을 췄다. 빠르게 높게 또 민첩하고 날카롭고 강하게. 자기 앞에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그녀는 ‘몸’의 동작으로 채워나갔다. 입으로 구구절절 자신을 설명하고 말해봐야 뉴욕에 있는 상대는 외국인이니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깊은 침묵으로 오직 자신의 몸으로만 한 동작 한 동작 공간을 재단하고 자르고 또 질러나가야 했다. 그것은 어쩌면 고통이었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가누고 비우고 연마하는 고행이었을 것이다.

   
photographer 장진우
 
   
photographer 장진우
 
   
photographer 장진우
 
최수진이 빽빽한 뉴욕의 고층빌딩 사이 도시의 정글에서 ‘춤’을 공부하고 출 때, 누구하나 반갑고 다정하게 맞아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막막한 ‘첨단의 사막’에서, 마치 오아시스(oasis)의 ‘춤’추는 전령(傳令)으로, 또 영혼의 전사(戰士)처럼, 낯선 이들 앞에서의 ‘춤’의 몸 사위는 외로움에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는, 새로운 표현에 도달하고자 실패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단(剛斷)으로 모험의 연속이어야 했을 것이다.

뉴욕의 도시공중에 매달려 달려가는 전철의 굉음이 이십 초반 나이의 최수진의 생을 흔들 수는 없었다. 빠르게 4년이 지났다. 뉴욕의 무용단은 동양인 최수진을 공연포스터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고 뉴욕의 미디어들이 최수진을 찾기 시작했다. 빠르고 유창할 수 없는 영어로 겨우 ‘단어’를 이어나갈 수밖엔 없었을 것이다.

어떤 정점(頂点)에 빠르게 도달한 것인가? 그 때 그녀는 문득 자신을 돌아봤다.
‘내가 추는 춤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나는 가려고 하는가? 일어날 일은 일어났다, 인내를 가지고 뛰었다, 내일에 희망도 걸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내 과거는 어디에 있는가?’

   
Pointe 매거진
 
최수진은 성장하며 변화를 겪었다. 지난 4년간 365일씩 하루도 빼놓지 않고 춤으로 뉴욕에서의 인생을 살았고, 한 주기(cycle)를 마감할 때가 됐다고 느꼈다. 제 1 장(章)을 숨 가쁘게 달려온 것이다.

삶은 의외로 아주 단순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왔다. 20대 후반으로 들어서는 이 시기에 무엇인가를 찾아서 뉴욕으로 나섰다는, 자신 스스로 지난 시간에 대해서 대견함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새롭게 제대로 알아야만 할 것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때이고, 육체와 영혼은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을 했다. 뉴욕의 소속 무용단 단장이 그녀를 붙잡았지만 최수진은 한사코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은 언제든 다시 와서 춤출 수 있으니, 새로운 모험의 길을 떠나고자 했다. 거슬러 떠나온 곳인 자신의 근거였던 서울로 되돌아온 것이다. 

   
‘Out of mind’ photographer 이지락
 
   
‘Out of mind’ photographer 이지락
 
무용수로 최수진의 이력은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안무가로의 최수진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선보이는 첫무대가 바로 내가 본 무대였다.  
                  
그녀의 춤동작엔 현대무용(Contemporary dance)의 독특한 어휘를 가지고 있었고, 몸을 이동하는 호흡엔 ‘몸’의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형(metamorphose) 시키는 손동작이나 발동작, 낱낱의 움직임에서 그녀의 ‘춤사위’는 약동적이었다. 그리고 ‘춤’의 안무는 영민(英敏)했다.

안무가 최수진은 무용수 6명(이루다, 김봉수, 오윤지, 이준옥, 임종경, 최수진)의 동작에서 활달할 표현을 이끌어냈다. 몸통, 머리, 팔, 어깨, 손, 다리, 심지어 손가락까지 이용한 무용수들의 춤동작은 테크닉이 뛰어났다. 특히 독무(獨舞)를 추는 무용수 이루다의 춤엔 독특한 다이너미즘(dynamism)이 느껴졌다.

등장한 무용수들은 최수진이 설계한 안무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했다. 무대 위에서 자신들 춤의 중력(重力)을 잘 다스렸다. 훌쩍 도약하고 착지하는 힘은 비단 테크닉의 뛰어남만이 아니었다. 시간과 공간의 강렬한 감정 상태를 몸으로 ’포착‘해 내는 심리적인 능력에서 이들은 돋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춤‘의 느낌과 감정을 세밀하고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용수들이 자신들의 ’춤‘을 스스로 통제하는 역량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단지 육체적인 노력으로의 테크닉만이 아닌, 자신들의 정신력으로 지적 이해력으로 자신들의 ‘춤’을 췄다는 사실이다. 이는 안무가로의 최수진의 리더십과 능력이다. 
     

   
사진제공 전미숙 안무
 
   
사진제공 전미숙 안무
 
놀라웠다. 최수진 무용가, 안무가의 공연. 한국현대무용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무대를 가르는 그녀의 도약과 활주(滑走)에는 독특한 그녀의 에너지가 응축되어 뿜어져 나왔다. 걷거나 달리거나 움직임은 세련됐고 시간과 공간을 수놓는 에너지엔 간결(簡潔)한 ‘긴장’(緊張)이 있었다.

기실 현대무용은 무용수의 감정과 안무가의 목적에 맞추는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즉 창조이다. 춤은 시간과 공간의 단계와 조합이다. 그래서 진짜 ‘춤꾼’이란 딱 5분만 춤추는 모습을 본다면 진짜와 가짜를 바로 분별한다. ‘춤’이란 감각의 점화(點火)이자 현대예술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가장 선명(鮮明)한 예술장르다. 현대음악이나 현대미술의 경우, 어떤 음악이 어떤 미술이 좋은 음악이고 미술인지 때때로 헷갈리게 하지만, ‘춤’은 다르다. 즉각적 즉생즉(卽刻的 卽生的)이다. ‘춤’이란 세상과 자기존재를 한 순간에 드러내고 말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춤’이란 슬픔과 기쁨을 그대로 순간에 찰나(刹那)에 공중에 새긴다.

몸 전체의 확장, 창의적인 동작들,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든 안무가 최수진은 세상에 대한 느낌과 감정을 ‘춤’이란 움직임으로 자기 직관에 의해 표현해냈다. 최수진은 자신의 안무에 초점을 맞추면서 무대전체의 흐름을 구축하는 능력에서 안무가로 뻗어나갈 수 있는 탄탄한 실력을 보였다. 29살의 안무가, 무용가 최수진에게서 나는 많은 가능성을 봤다.

   
Cedarlake dance company
 
   
사진제공 전미숙 안무
 
   
사진제공 전미숙 안무
 
   
Cedarlake dance company
 
무용가 최수진은 무대에 등장해서 네 면을 자른 ‘종이뭉텅이’를 양팔 가득 안고나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무대에 뿌리듯 던졌다. 그것도 여러 번 연속된 동작으로. 나는 무용가 최수진의 동작을 바라보면서 슬펐다. 이제 스물아홉 살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최수진의 생의 전환이 고스란히 내게 비쳐졌다. 그렇다. 세상은 아프고 괴롭다. 하물며 스물아홉의 인생에서 제대로 살고 있다면, 이 세상은 괴롭고 슬픔으로 가득 찬 것임을 알아차린다. 인생이란 한 발은 환영(幻影)에 담그고 다른 한 발은 혼란과 혼돈 속에 빠트린 채 살아가지만, 정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삶의 순간순간을 최선으로 피어나게 하는 ‘춤’처럼, 자연으로 자연처럼 겸손하게 소박하게 사는 능력일 것이다.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인 최수진의 ‘춤’은 자유롭게 흐르는 ‘춤’의 의식(儀式)이자 자신만의 ‘춤’ 스타일로 자신의 자유를 춤추고 안무했다. ‘춤’으로의 한 예술가의 확연한 면모를 나는 봤다.

지난 화요일 22일 북한산 산자락 한 미술관에서 최수진을 만나 대화를 나눴다. 비가 내렸다. 사진 찍기는 훗날로 미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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