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우랜 우여곡절 끝에, 여러 차례의 위기에도 잘만 버텼던 김재철 문화방송(MBC) 사장이 방문진의 의결 끝에 간발의 차이로 해임되었다. 시작부터 ‘청와대 조인트’로 대표된 낙하산 논란 속에서, 공영성과 담을 쌓은 정권 충성 이미지를 조금도 부정할 의욕도 없이 저널리즘 품질을 급락시킨 장본인으로 꼽혀온 인물이었다. 나아가 청와대와 보수여당의 정치적 이권으로 움직이는 방문진 이사회 다수파의 보호를 필살기 삼아서, 입바른 말을 하는 기자들을 좌천 및 해고시키는 철권을 휘둘렀다. 문화방송 직원들의 반복된 파업, 시민사회와 야권 정계의 압박은 물론이고 공금유용 혐의 등 도덕적 결함까지 추가되어도 강력한 권세를 자랑했다. 그런 그가 결국 물러나게 된 것이다.

권세라고 하니 권왕이라는 말이 생각나고, 동음이의 한자로 그 호칭을 얻었던 만화캐릭터가 문득 떠오른다. [북두신권](부론손, 하라 데츠오)이라는 만화에 나오는 라오우라는 인물인데, 핵전쟁으로 몰락한 인류문명이 약육강식의 야만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절대적인 권법 능력으로 부하들을 휘어잡고 자신의 세력권에서 공포 정치를 펼치는 자다. 물론 작품은 켄시로라는 정의의 권법가가 그런 세상을 고독하게 떠돌아다니며 핍박받는 약한 자들을 위해 싸움 실력을 발휘하는 내용이라서, 결국 권왕 라오우는 치열한 싸움 끝에 결국 켄시로의 일자전승 비급 무공에 스러지고 만다.

   
하라 데츠오의 '북두신권' 가운데.
 
그런데 워낙 이 작품이 일본 연재 당시 인기작이었기에, 주인공 필생의 라이벌이 죽었다고 해서 연재를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작품 안에서 흥미로운 일들이 발생했다. 공포로 통치한 권왕이 쓰러졌다한들, 그 뒤로 딱히 세상이 나아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쪽이 없어졌어도, 세상에는 다른 세기말 패왕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권왕의 위세로 인해 가려져 있었을 뿐, 그 너머에는 여러 비슷한, 혹은 더 심한 이들이 넘치고 라오우의 빈 자리를 채워 넣을 따름이다. 물리적 폭력의 강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전제를 고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반복될 모습이며, 연재는 독자들이 질려서 떨어져나갈 때까지 계속할 수 있다.

문화방송 김재철 전사장의 퇴임이 결정되자마자, 차기 사장 후보들이 물망에 오르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과연 어떤 종류의 인물들일까. 우선 가장 먼저 거론된 이들 중 하나는, 김재철 사장 재임 당시 그의 충실한 대변인 역할을 해온 이진숙 본부장이다. 전두환 나가고 노태우 들이던 역사의 데자뷔가 아닌가 씁쓸해지는 풍경이다. 하기야 전임 정부 내내 정권 실세노릇을 했다가 말미에 각종 비리가 적발되며 감옥으로 향한 인물이 주도했던 방송통신위원회의 차기 위원장으로는, 신문의 방송 진출을 허용하자며 미디어법 날치기에 적잖은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오랜 친박 계열 이경재 의원이 후보로 지명되어 있는 상태 아니던가.

구심점이 되어준 악역 한 명이 퇴장하는 것은, 하나의 분기점일 뿐이다. 김재철 전사장을 등극시켰으며 해임 기회에서 세 번이나 그를 지켜준, 저널리즘의 공공성 규범보다는 여당-청와대의 입김이 일방적으로 강력하게 작용하는 방문진 이사회 특유의 구조는 아직도 그대로다. 북두신권에서 권왕 라오우 뒤에 성제 사우저가 등장하기에 딱 좋은 배경이다.

하나의 분기점을 넘었으니 그 다음 이뤄내야 할 것이란, 공영방송들이 오로지 해당 업종의 근간 규범, 즉 한쪽으로는 저널리즘의 공정성과 깊이, 다른 쪽으로는 활발하고 자유로운 대중문화 창작의 장려를 지켜내는 것만을 최우선으로 하도록 지배 체제를 개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시민 이사 지분 확보든 이사 임기 탄력화든 업계/학계의 추천 우선화든 뭐든, 다양한 방식의 상호 감시와 방향 수정이 가능해질 때 비로소 또 다른 세기말 패왕이 등극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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