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역사전쟁'이 본격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선 기간 새누리당은 외신 기자들에게 '독재자의 딸'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아 달라는 문서를 전달했다. 한국의 많은 외신 기자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독재자인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논란은 되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는 15일자 5면에 <원로들이 우려한 좌파의 인터넷 다큐 '백년전쟁'>이라는 기사를 냈다. 친일파 청산운동을 하는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를 '좌파'라고 규정하고, 이들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백년전쟁'은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다큐멘터리로 현재 유튜브 조회 수가 200만건을 넘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가 원로급 인사 12명과 오찬을 함께 했다. 박 대통령의 오른쪽에 앉았던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러시아 대사)은 박 대통령에게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일을 많이 왜곡해서 다루고 있다"며 "이런 역사 왜곡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은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고 일일이 메모하며 경청한 뒤 '잘 살펴보겠다'고 답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백년전쟁'은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을 주관해 작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공개한 좌파의 영상물"이라며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동아일보의 자매지인 신동아 3월호도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라는 기사에서 "역사를 왜곡해 친일파로 몰고, 사진을 합성해 '플레이보이'로 비하했다"고 보도했다. 신동아는 "그들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세력을 친일파로 규정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냈다"면서 "친일이라는 좁은 시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했는지 추적했다"고 전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운동을 하는 단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아니기 때문에 '좌파'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조선일보, 신동아, 이인호 이사장이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이 불편한 이유가 뭘까.
 
   
15일 조선일보 5면. 백년전쟁 포스터 상단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의 얼굴(맨 왼쪽 상단)이 있다.
 
만약 이들의 불편함의 배경에 친일파의 후손이라는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백년전쟁 포스터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뒤에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의 얼굴이 있다. 널리 알려지다시피 정부 산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방 전 사장과 김성수 전 동아일보 사장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바 있다. 
 
또한 박 대통령에게 고언(?)을 한 이인호 이사장의 친할아버지(이명세)도 1000여 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속해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이명세씨는 일제 식민지 시절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의 자격으로 지방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부응하는 시국강연을 했다. 그리고 그는 조선유도연합회의 기관지 '유도(儒道)'에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유교를 통한 황국신민의 본분을 다하자는 것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동아공영을 만들자는 내용의 논설과 한시를 게재했다. 
 
방응모, 김성수, 이명세, 이 세 사람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백년전쟁' 비판이 조상의 친일행적을 무의식적으로 변명하기 위해 친일청산운동단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길 바란다.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의 친할아버지인 이명세씨의 한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IV-12권
 
이 이사장은 2004년 조선일보에 실린 대담에서 '친일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야 할까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잘못된 과거를 분명히 알려줄 필요는 있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이지요. 역사학자들이 친일청산 문제를 연구해 오고 있는데, 학자들에게 맡겨둬야 합니다."
 
친일 문제청산은 물론이고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바라보는 관점과 평가가 학술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학자들에게 맡겨두자던 이 이사장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며 정부차원의 대책을 요청한 저의는 무엇인가.
 
오히려 이명박 정부 시절 일어났던 역사왜곡 논란처럼 이승만, 박정희 등 군사독재시절에 대한 재평가를 하자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이인호 이사장은 이명박 정부 초기 '광복절을 건국일로 제정하자'는 운동을 펼친 '건국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다. 
 
이 이사장은 당시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백범 김구의 얼굴을 고액권 화폐에 새기는 것에 대해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끝나야할 분이다. 살아 생전 대한민국 체제에 대해 반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한민국과 결부시킬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연좌제 차원으로 이들의 주장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똑같이 할아버지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홍영표 민주통합당 의원의 활동을 보자. 홍 의원은 최근 "총선 과정에서 가족사를 알게 됐다"며 "조부님에 대해서는 항상 역사와 국민 앞에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어 홍 의원은 독립유공자 지원 대상을 확대하는 내용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하고, 공청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할아버지의 활동을 사죄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홍영표 민주통합당 의원은 할아버지의 친일행위를 공개적으로 사죄하고 독립유공자 지원을 확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 보도에 이어 뉴데일리는 15일 대통령과 이 이사장의 대화에 대한 청와대의 반응을 전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예민한 문제다. 대통령도 '잘 살펴보겠다'고 대답했고 대통합을 새 정부의 최대 과제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도 어떠한 지침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했다.
 
보수 인사가 불을 지피면, 언론이 부채질을 하고, 이에 호응하듯 정부가 "역사 왜곡을 엄벌하겠다"며 친일과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주장을 사전에 차단하고, 역사 교과서를 수정하는 그림이 연상되는 것은 과도한 상상력 때문일까. 
 
부디 이 시나리오가 기자의 엉뚱한 상상으로만 남길 바라며 지난 2011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할아버지의 친일행위를 공개적으로 사죄한 윤석윤씨의 글을 박 대통령과 조선일보, 신동아 그리고 이 이사장에게 보여주고 싶다. 국민들은 아직 '다카키 마사오'와 친일파와 군사독재를 기억하고 있다. 
 
"해방 후에 반민특위를 통해서 친일파들을 청산하지 않은 것이 역사의 치명적 약점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많은 친일인사들이 해방된 새로운 정부의 공직에 일하면서 과거 친일행위에 대한 사죄와 반성도 하지 않고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이고 자꾸 그런 것을 들춰내어 왜 갈등을 조장하느냐고 뻔뻔스럽게 말하는 그들을 보면서, 그것이 지금의 남남갈등의 뿌리라고 생각하는 나, 친일파와 그의 자손들은 치부한 재산으로 호의호식하고, 공부하고, 성공하고 해방 후 사업가, 정치가, 공직자로서 활동하였는데, 독립운동을 하셨던 당사자들이나 후손들은 춥고 배고프고, 공부도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이런 개같은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분개했던 나였는데 오늘 내가 친일파의 후손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시느라 수고하신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국민과 역사 앞에 그리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혹은 고생하신 많은 분들과 그들의 자녀분들에게 친일파였던 할아버지를 대신해 한 친일파의 손자가 가슴깊이 사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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