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위키리크스의 잇단 폭로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4월 5일 공개된 <부수적 살인(Collateral Murder)> 동영상은 충격적이었다. 아파치 헬기의 30mm 기관포가 불을 품었다. 지상에 있던 일군의 사람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미군의 타깃이었다.

문제는 다음 장면. 쓰러진 이들을 살피러 접근하던 일군의 민간인들과 그들이 타고 온 봉고차에도 총격이 가해졌다. 헬기의 병사들은 그들이 위협적인 존재라며 ‘사격 인가’를 내려줄 것을 거듭 요청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다. 거기에는 아이들까지 있었다.

공개된 동영상을 보면 미군 헬기병들은 마치 게임하듯 사격했다. “계속 쏴”, “잘했어” “저 XXX들 죽는 것 좀 봐”…. 총기를 가지고 있다고 오인한 2차 사격 결과 그들이 비무장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들까지 부상한 것으로 확인되자 그들은 부모 탓을 했다. “왜 아이들은 데리고 와서…” 그 가운데 2명은 로이터통신 기자였다.

<부수적 살인>에 이어 <미외교전문> 폭로한 위키리크스 그 배후엔…

<부수적 살인> 동영상 공개로 위키리크스와 그 대표 줄리아 어산지는 단숨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일지(war log), 그리고 이어진 미 국무부 외교전문 공개는 전 세계를 뒤흔들어놓았다. 튀니지와 이집트로 그 불똥이 튀었다. 집권자의 부패와 추악한 뒷거래 실상이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것은 들불처럼 예멘, 리비아, 시리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어쨌거나 그 내용은 물론 그 양에 있어서도 사상 최대의 기밀 유출 사건이었다. 미국 정부는 어산지를 ‘미국의 공적’으로 선포했다.
 

   
동료들과 휴식시간을 보내고 있는 브래들리 매닝(Bradley Manning) 일병. 그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와 정치 등에 관심이 많았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따라하지 않을 정도로 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컸으며, 게이여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사진은 가디언이 제작한 브래들링 매닝 관련 프로그램의 한 장면.
 

과연 누가, 어떻게 이런 어마어마한 정보를 위키리크스에 제공했을까? 정보 제공자의 신원은 그 때 이미 밝혀져 있었다. 미 육군 브래들리 매닝 일병, 그는 2010년 5월 26일 이라크 바그다드 현지 군부대에서 체포됐다. 기밀 유출 혐의였다. 전쟁일지 등은 아직 공개도 되기 전이었다. 그가 ‘아드리안 라모’라고 하는, 꽤 유명한 해커와의 채팅에서 “한 달 전에 폭로된 <부수적 살인>은 물론 전쟁일지, 그리고 국무부 외교전문을 이미 위키리크스에 넘겼”다고 털어놓은 직후였다. 해킹 사건으로 미 연방 수사국(FBI)의 수사를 받았던 적이 있었던 라모는 즉각 FBI에 이를 신고했다.

위키리크스나 어산지는 지금껏 정보제공자가 매닝임을 공식 확인해주지 않았다. 매닝도 며칠 전까지는 혐의사실을 시인한 바 없다. 2월 28일, 메릴랜드 주 포트미드 군사법정에서 매닝 일병은 처음으로 자신의 유죄를 인정했다. <부수적 살인> 동영상을 비롯해 <전쟁일지>, <국무부외교전문> 등을 위키리크스에 넘겨준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그는 유죄 인정과 함께 35쪽 분량의 모두진술(statement)에서 <부수적 살인>과 <외교전문> 등을 공개한 경위와 이유를 상세하게 밝혔다. 그의 모두진술은 정보분석요원답게 사실을 뒷받침하는 간명한 내용들로 구성돼 있다. 사실과 의견의 구분도 명확하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구체적인 공개 경위다.

워싱턴포스트·뉴욕타임스가 외면한 위키리크스 특종들

그는 ‘진정한 세상 경험’을 쌓고 대학등록금 지원 혜택을 받기 위해 19살에 군에 입대했다. 어려서부터 컴퓨터와 소프트웨어에 능했던 그는 정보 분석 업무를 희망했다. 왜소한 체구와 체력 미달로 1차 훈련과정에서 탈락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는 재도전에 성공해 희망했던 정보분석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이 세상을 뒤흔드는 ‘폭로의 길’이 될 것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바그다드에 파견된 그가 맨 처음 공개하기로 한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일지. 공식명칭은 주요 작전사항(SigAct:Significant Activity)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행해진 미군의 모든 작전 내용이 수록돼 있다. 그는 당초 이를 정보 분석을 위한 백업용으로 별도 저장을 했지만, 점차 그 공개의 필요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전쟁일지에 기록된 것과 언론의 보도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그가 전쟁일지로 살펴본 전쟁의 실상은 일방적이고 무모한 것이었다. 그는 이 두 개의 <전쟁일지>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기록”이 될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해가 갈수록 수렁에 빠지고 있다. 우리는 명단에 있는 인간들을 죽이거나 체포하는 데 혈안이 돼 있으며,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현지의 파트너들과도 별로 협조하지 않는다. 근시안적인 목표나 과제를 수행하면서 야기될 제2,3의 파장들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런 실상을 알려주는 이들 정보들을 미국인들이 접할 수 있게 된다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관련 군사적 대응이나 외교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2010년 1월, 휴가차 미국 워싱턴DC에 머물고 있던 매닝은 마침내 워싱턴 포스트에 이를 제보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의 한 여기자와 통화했다. 그는 5분여에 걸쳐 그가 제공하려는 막대한 양의 정보에 대해 설명했다. 그녀는 일단 편집국 윗선에서 검토를 해본 후에야 보도 여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다고 응답했다. 별로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는 이번에는 뉴욕타임스 퍼블릭 에디터와 접촉했다. 음성녹음기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스카이프 전화번호와 전자우편 주소도 남겨놓았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두 신문사가 희대의 특종을 놓치는 순간이었다.

그는 마침내 위키리크스를 찾았다. 내부 채팅방에서 몇 차례의 대화 끝에 위키리크스야 말로 자신이 접촉할 수 있는 최선의 매체라고 판단했다. 위키리크스가 당시 채택하고 있던 익명의 파일 전송 방식은 그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신문사에 넘길 경우에 참고용으로 주려 했던 메모 파일도 함께 전송했다.

“정보원이 노출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삭제 처리됐습니다. 이들 방대한 데이터들을 효과적으로 공개하고, 또 정보원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90일에서 100일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자료는 전쟁의 실상과 21세기 비대칭 전투의 진면목을 잘 드러내주는 이 시대의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좋은 하루되기를.”

미 국방부 <부수적 살인> 부인하자 상관에게 원본 링크 보내기도

그가 “조종사들이 피에 굶주린 것처럼 보였다”고 묘사한 <부수적 살인> 동영상 유출 과정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전장의 진상을 드러내는 데 열심이었는지 잘 드러난다. <부수적 살인> 동영상은 그가 처음 포착한 영상이 아니다. 같은 부대의 다른 정보 분석 요원이 먼저 문제를 제기했던 사안이다. 이들의 행동이 교전수칙에 부합하는지 의문을 나타냈다.

매닝은 추적조사에 나섰다. 당시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로이터 기자 2명이 희생됐고, 로이터가 비디오테이프의 존재를 알고 정보공개를 청구한 것도 파악했다. 교전수칙에 어긋나는 점도 확인했다. 매닝은 그 동영상을 내려 받아 처음에는 로이터에 보내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제공한 다른 사안이 위키리크스에서 즉각 공개된 것을 보고 이 동영상 역시 위키리크스에 보냈다.

그의 ‘작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부수적 살인>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미 국방부는 비디오테이프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그의 지휘라인에 있던 대위급 간부도 마찬가지 주장을 폈다. 그는 그가 유출한 원본 동영상 파일 링크를 상관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그 상관은 더 이상 <부수적 살인>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 할 수 없었다. 해당 파일을 유출시킨 장본인으로서는 상당히 위험한 처신일 수 있었다.

그는 모두진술에서 잠시라도 망설였던 것은 미 국무부의 외교전문을 보낼 때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대중들에게 공개돼야 할 정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음습한 외교전문들은 보다 공개적인 외교의 필요성을 잘 설명해줄 것이었다. 그것이 공개될 경우 미국 외교 관리들이 경악할 것이란 것쯤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그를 고발한 라모와의 채팅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 국무부 외교문건은 모두 위키리크스에 전달됐어.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신만이 아실거야. 희망하건대 전 세계적인 토론과 논쟁, 개혁이 있었으면 해.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 사회에 대해 포기할거야.”

위키리크스, 어산지, 그리고 매닝일병…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 반향은 컸다. 그가 희망했던 대로 세계는 그가 공개한 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랍의 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마도 일개 병사로서 세계를 이처럼 뒤흔든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그 대가도 크다. 그는 자신이 인정한 혐의만으로도 20년 형을 살아야 할 지 모른다. 군 검찰은 그것으론 끝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적을 이롭게 한 혐의로 간첩죄를 적용하려 한다. 그렇게 될 경우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진 않았다. 재판관의 우려와 중단시킬 수 있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35쪽 짜리 모두진술(statement)을 읽어 나갔다. 세상을 향한 그의 첫 ‘공개발언’인 셈이다. 그의 유죄인정에도 불구하고 검찰과 재판장은 이제 그가 모두진술에서 밝힌 ‘공개의 정당성’부터 반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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