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드라마 <야왕>의 이야기는 여주인공 다해가 어린 시절 자신을 성폭행한 의붓아버지를 죽이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자수하려 하지만 다해를 사랑하는 하류는 이를 만류하며 시체를 산속에 매장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하지만 다해는 끝내 ‘성폭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의붓아버지 사체가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결국 발각되자 하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악행'을 저지른다. 또한 하류의 출소일이 다가오자 다해는 그가 자신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다 하류의 쌍둥이 형을 죽게 만든다.

이렇듯 성폭력에 관한 일들을 여주인공의 목을 점점 죄어간다. 사랑 대신 욕망을 선택한 다해는 거침없이 상류사회로 올라가지만 그의 발목을 잡는 건 결국 ‘성폭력’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의 위치는 성폭력 피해자에서 어느덧 살인자 그리고 살인교사자로 바뀌어 있다.

드라마 <야왕>뿐 아니라 최근 아동 성폭력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많아지고 있다. 얼마 전 막을 내린 MBC 드라마 <보고싶다>나 영화 <돈크라이마미>도 성폭력에 관한 이야기다. 최근 몇 년간 조두순 사건이나 고종석 사건 등 아동 성폭력 사건이 사회적으로 부각된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이 세 작품의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성폭력 가해자에 대해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이 직접 복수에 나선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은 1992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의붓아버지 살해사건을 떠올리게도 한다. 9살 때부터 12년간 의붓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김보은은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남자친구 김진관과 함께 의붓아버지를 살해했다.
 
1심 재판부는 ‘정당방위’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자 항소심 재판부는 김씨에게는 징역 5년에 집행유예 5년을, 남자친구에게는 징역5년을 선고한다.

김부남씨 사건 역시 비슷하다. 9살 때 당한 성폭력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결국 20년 후 가해자를 찾아가 살해한다. 아동성폭력 사건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김씨가 법정에서 한 진술,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어요”라는 말은 아직까지 회자되는 말이다.
 

   
▲ SBS 드라마 <야왕>
 

하지만 성폭력 사건 전문가들은 <야왕> 등 드마라나 영화가 성폭력을 다루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거나 뭔가 특별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한 활동가는 “우리나라에는 성폭력 피해자가 별탈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화가 있다”며 “이 드라마에도 성폭력 피해자는 극단적인 경험을 해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활동가는 “성폭력 피해 경험이 인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만 드라마에서 말하는 것처럼 본인의 인생을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되진 않는다”며 “캐나다에서는 성폭력을 폭력의 일부로 보고 있는데 주다해의 모든 선택이 성폭력에서 기인한다는 설정 자체가 오히려 가부장적이다”고 비판했다.

가해자에 대해 직접 응징한다는 설정 역시 ‘성폭력은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에 역행한다’는 입장이다. 이 활동가는 “김부남씨 사건은 당시 성폭력이 공공연하게 용인되고 이를 공론화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나온 선택이었고, 피해자도 이런 선택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성폭력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회적 인식이 확산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2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복수를 한다는 설정은 아직도 성폭력은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고 우려했다. 

 

   
▲ MBC 드라마 <보고싶다>
 

다른 성폭력 사건 전문가도 "성폭력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이기보다는 단지 여자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방식으로만 '성폭력'을 선택한 것 같다"며 "이는 드라마가 남자주인공에게 시련을 주는 방식과는 매우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 전문가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성폭력 기억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고싶다>의 이수연이 사람들과 부딪힐까 두려워하거나 샤워기를 틀어놓고 통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피해자는 성폭력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시각을 반영한다”며 “이런 피해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피해자도 많은데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이 반복되면 피해자를 정형화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이럴 것’이라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확산되고, 이는 오히려 당사자들의 피해 극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야왕>은 다해에게 닥친 앞으로의 인생 역시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드라마 첫 회가 검사가 된 하류가 영부인 다해를 수사하기 위해 청와대를 압수수색하는 장면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다해는 성폭력 사건을 덮기 위해 각종 난관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드라마는 ‘성폭력 피해자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산다’는 편견을 본의 아니게 강조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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