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바둑의 최강자 이세돌 9단이 사실상 국내 바둑계를 떠나고자 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세계 바둑 1인자 ‘쎈돌’, 왜 서른 살에 은퇴하고 미국 가려 하나”(경향신문 2월 8일)을 참고하기 바란다. 다만 이 기사에서 교육 칼럼니스트의 눈을 사로잡는 부분은 바로 바둑도장과 학부모 부분이다. 한국 교육의 고질병이 바둑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세돌 9단의 전언에 따르면 현재 세계 최정상을 지키고 있는 한국 바둑계가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바둑도장들이 창의력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바둑의 무한한 세계를 스스로 깨우치도록” 했다면(심지어 서봉수, 유창혁 같은 독학 고수들까지 있었다), 지금은 정석과 묘수풀이 등 승부에서 이기기 위한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런 교육으로는 결국 세계 최정상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바둑 도장들이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이세돌 9단은 두 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바둑 도장들이 ‘장사’에만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학부모들이 사범들을 믿지 못하고 닦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깊게 따져보면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장사’가 잘 되지 않으면 문을 닫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도장들이 장사에 매달리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으며, 장사를 잘 하려면 학비를 지불하는 학부모들의 요구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학부모의 요구로 집중된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은 자녀에게 도취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자녀를 바둑 도장에 보내 전문기사의 길을 걷게 하겠다고 결정한 학부모치고 자녀가 바둑 신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부모는 거의 없다. 따라서 그들 생각에 그들의 자녀는 빨리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 정상이다. 바둑을 배우는 정상적인 코스와 과정은 필요 없다. 그건 보통 학생들에게나 해당되는 것이고, 신동인 그들의 자녀는 당연히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과정보다 더 빨리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건 사범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범들은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과정보다 더 빨리 문하생들이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방법은 승부의 묘수, 비기를 가르쳐서 대회에 나가 이기고, 되도록 어린 나이에 입단하고 승단해서 신동 느낌을 계속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이세돌 9단의 뼈아픈 지적처럼 “꿈나무들이 창의력이나 가능성 등을 살리지 못하고 도장의 스승들만 닮아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주입식으로 전문기사인 사범들의 묘수를 익힌 어린 학생들이 승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한 어린 기사들이 누구나 그 정도의 묘수는 풀 수 있는 수준의 전문기사들의 세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창의적인 한 수"는 만들어내기 어려울 것이다.

칙센트미하이가 그의 명저 “창의성의 즐거움”에서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창의성이 발현되기 위해서는 음미하고 숙성시킬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며, 창의성을 발현할 영역에서 흥미를 느끼고 몰입할 대상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른들이 기다려주지 않으며, 빠른 성취를 요구받고, 피 말리는 승부와 경쟁만 가득하다면 이런 환경에서는 어떤 창의성도 발휘되기 어렵다.

   
이세돌 9단.
©연합뉴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은 바로 그 분야에서 성공한 전문가들, 바둑 사범들이다. 그들은 한 사람의 어린 기사가 전문 기사가 되기까지 성장과정을 학부모 보다 훨씬 잘 알고 이해한다. 그런데 그런 사범들이 학부모의 비전문적인 요구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그리고 그 요구가 옳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장의 ‘장사’를 위해 할수없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조금 기다리고 여유를 가지고서 바둑을 즐기도록 했더라면 훨씬 더 창의적이고 큰 기사로 성장할 수 있었을 꿈나무를 그만 잠깐 동안 화려하고 말아버리는 꽃꽂이나 분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것이다.

이게 어디 바둑만의 일일까? 학교 교육 역시 이와 별 다르지 않다. 어린이들의 성장과 발달, 그리고 재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은 초등학교 교사들이다. 사춘기 청소년에 대해서는 중학교 교사들이 가장 잘 안다. 많아야 두세 명의 어린이나 청소년을 길러 보았을 학부모와 여러 해에 걸쳐 수백 명의 다양한 환경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집중적으로 마주한 교사들의 경험의 폭과 깊이는 비교하기 어렵다. 게다가 교사들이 자기 학생에게 도취되는 경향은 학부모가 자녀에게 도취되는 경향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에 비교적 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장사’를 해야 하는 학원에 비해 ‘장사’를 할 필요가 없는 학교가 자녀에게 내리는 평가는 훨씬 냉정하고 엄격하다. 그러나 자신의 자녀가 신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도취된 학부모는 학교를 거부한다. 사실 95% 의 학생은 평범하다. 한 반 30명 중 28명은 평범한 학생들이다. 그게 정상이다. 그리고 보통교육기관인 학교는 평범한 학생들이 평범하지만 건실한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곳이지, 비범한 학생들을 특출한 인재로 길러내는 곳이 아니다. 그런 기관은 각 시도에 하나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 학생들의 재능은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겠지만, 구태여 모든 학생이 그렇게 되고자 노력해야 할 이유는 없다. 즉 귀댁의 자녀가 평범한것은 학교가 못가르쳐서가 아니라 원래 그게 정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평범한 일에 종사하며 평범한 삶을 살게 되어 있다. 이 세상은 과학자, 예술가, 펀드매니저, 변호사, 의사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물론 이들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들의 역할은 보조적이며, 인구의 10% 이상이 이런 직업군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지탱되기 어렵고, 찾아보기도 어렵다. 어느 나라나 인구의 대부분은 농부, 노동자, 주부, 작은 가게의 상인,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 조리사, 택시나 버스 기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게 정상이며, 이들의 평범한 시민들의 힘으로 사회가 지탱된다. 그리고 창의성은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만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평범해 보이는 분야에서 자기 일에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는 사람들을 통해 발휘되는 것이다. 특정 직업군에서만 창의성과 재능이 발현되는 나라와, 모든 직업군에서 창의성과 재능이 발현되는 나라 중 어떤 나라가 발전가능성이 클지는 물어보나마나한 질문이다. 더구나 이 상태로 대한민국은 5%는 기계적으로 익힌 주입식 지식의 수동적 저장고들, 나머지 95%는 열패감과 분노에 가득찬 실패자들로 가득하게 될 판이다. 이건 국가적 위기다.

그러니 대한민국의 학부모들은 다음 세 가지를 배워야 한다. 첫째, 내 자녀는 특출하지 않지만, 그것은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정상적이란 뜻이다. 둘째, 내 자녀가 어떤 성취를 이루기를 바란다면 결과를 급하게 재촉할 것이 아니라 자녀가 그 분야에 흥미와 즐거움을 느낄 만큼 충분한 여유를 두고 기다려야 한다. 설사 성취가 미약하다 하더라도, 자녀가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아니겠는가? 셋째, 내 자녀의 성공을 위한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분야의 교육자다. 자녀를 이런 저런 교육기관에 보내는 것은 생업에 종사하느라 가르칠 시간이 없어서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교육 전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를 명심하고 시간과 여유를 찾고, 학부모가 자녀에게 너무 집착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면서 자녀를 기다려 준다면 대한민국의 교육문제는 대부분 해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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