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고, 이에 항거해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추였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김기설 사회부장이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몸에 불을 붙인 뒤 숨졌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노동자·학생들이 잇달아 분신했다.

이때, 당시 ‘저항시인’으로 알려졌던 김지하씨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을 발표했으나, 박홍 서강대 총장은 “죽음을 선동하는 운동권세력”이라며 마치 ‘열사정국’을 운동권의 조작인 것처럼 말했다.

말 뿐이 아니었다. 공안당국은 김기설 사회부장의 유서를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이 ‘대필’했다며 재야·민주화 운동 세력을 매도하며서 강기훈씨를 구속했다. 이 사건으로 진보 진영은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열사정국’의 책임이 민주화운동 세력에 덧씌워져 노태우 정권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서 대필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그러나 ‘김씨의 유서는 본인이 작성한 것’이라는 2005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재감정 결과가 나온데 이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2007년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신 쓰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한진중공업 최강서 노조 조직차장이 지난달 21일 목숨을 끊었다. 최강서 차장은 유서를 통해 한진중공업 파업 당시 사측이 노조에 제기한 ‘158억 손배소’를 비판하며 “가진자들의 횡포에 졌다”고 썼다. 박근혜 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좌절하면서도 산산이 흩어진 노조의 단결을 간곡하게 말했다. 그의 죽음은 누구의 탓일까?

 

   
한진중공업의 노조탄압과 정리해고를 규탄하며 지난해 12월 21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최강서 조직차장이 목숨을 끊었다. 성탄절 전날인 같은달 24일 저녁 고 최강서 조합원의 미망인이 남편의 제단에 밥과 음식을 올리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그런데 돌연 조선일보 고위간부가 이 책임을 되레 ‘운동권’의 ‘순교 예찬 코드’로 돌렸다. 박정훈 조선일보 부국장이 10일자 신문 35면에 쓴 <누가 또 ‘죽음의 굿판’을 펼치는가> 제하 칼럼이 그것이다. 박 부국장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기업의 대응, 정부의 무관심 등도 책임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도 주요 책임으로 “유령처럼 떠도는 ‘순교 예찬’코드”를 꼽았다.

박 부국장은 “노동자들에게 불가능한 환상을 주입하고 그것이 깨지는 순간 극단적 선택을 하도록 몰아가는 운동권 문화” 때문이라며 “민노총의 투쟁은 대게 실현 불가능한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2년 전 한진중공업 구조조정에 대해 “경영난에 허덕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외압에 시달린 한진중공업”이 해고자를 복귀시킨 뒤 휴직처리 된 것도 “일감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라는 논리이다.

박 부국장은 ‘용산 참사’에 대해서는 “농성장에 놓이는 시너와 휘발유통이 죽음의 문화를 상징해준다”며 “‘죽음의 굿판’ 세력은 법제도와 노동법규로 싸우는 대신, 단식하고 송전탑과 크레인을 오르는 쪽을 선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생명을 방패’로 내세웠다”며 “그들은 ‘박근혜와 조남호가 최씨를 죽였다’고 외친다. 정말 그럴까? 최씨 죽음에 진짜 책임 있는 사람은 누굴까”라고 물었다.

한진중공업은 필리핀 수빅에 조선소를 세우면서 영도조선소 노동자들에 정리해고를 가했다. 인건비가 그 이유였는데 조남호 회장은 2012년 34억 원 가량의 현금배당을 받는 등(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2020310444714245) 지난 4년 동안 180억 원의 배당금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4년 동안 영도조선소는 일감을 수주하지 못해 필리핀 수빅조선소에 일감을 몰아줬다.

한진중공업 크레인 농성을 벌인 김진숙 지도위원은 지난달 24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4년 동안 (영도조선소에)수주를 한 척도 안 받으면서, 작년에 조남호 회장이 기자회견에서도 분명하게 경영정상화를 약속했음에도 그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민주노조를 파괴하기 위한 걸로만 1년을 시간 허비를 한 것”이라고 사측을 질타했다.

한진중공업은 파업 합의 당시 ‘손배소를 최소화’키로 했으나 현재 노조에 제기된 손해배상총액은 158억 원에 이른다. 이는 한진중공업 노동자 209명이 158년 간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지난해 11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청문회 이후 지회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철회했지만 이 회사는 노조에 대한 손배소는 취하하지 않았다.

최강서 차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누구의 탓인가. 배당잔치를 벌인 한진중공업은 정말 박정훈 부국장의 말 대로 고용능력이 없는가. 정리해고라는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들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싸움을 멈춰야 하는가. 그들의 죽음이 함께 싸우는 노조의, 그들의 죽음을 막고자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영도로 향하는 희망버스의 책임인가.

박 부국장이 칼럼에서 내놓은 주장은 한진중공업과 국민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는 권력기관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 이를 노동자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싸움이 노동자들을 죽음을 내몬 자본과 권력을 향한 분노의 의미라는 점은 칼럼에서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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