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의 역사는 2012년 12월17일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다.”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로 꼽히는 전길남 일본 게이오대 교수의 이야기다. 전 교수는 월드와이드 웹의 창시자 팀 버너스리와 함께 인터넷 초기 개발자 다섯 명 가운데 한명으로 꼽힌다. 전 교수 덕분에 우리나라는 1982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터넷을 연결한 나라가 됐다.

전 교수가 말한 지난해 12월17일은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국제전기통신세계회의(WCIT)에서 국제국제통신규약(ITR) 개정안이 통과된 날이다.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은 서명을 거부했지만 193개 회원국 가운데 89개국이 서명을 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동유럽과 중동, 아프리카의 국가들과 함께 찬성 표를 던졌다.

3일 ‘인터넷을 둘러싼 권력 전쟁’이라는 주제로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하자센터에서 열린 포럼에서 전 교수는 “민주화가 진전된 나라들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 사이에 입장이 엇갈렸는데 우리나라는 민주화가 된 나라들 가운데 찬성 표를 던진 유일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은 왜 사인했느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전 교수는 “사인을 한 게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문제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대표단 30명이 대부분 텔레커뮤니케이션 출신이라는 것”이라면서 “인터넷 거버넌스(지배구조)를 논의하는 이런 중요한 모임에서 정작 이용자들 입장을 대변할 사람이 없었다는 게 문제”라고 덧붙였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기술 특보를 지냈던 수잔 크로포드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크로포드 교수는 “인터넷은 다중의 이해관계자(multi-stakeholder)가 공존하는 공간인데 정부가 권력을 갖고 수직상하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라면서 “미국이 찬성표를 던지지 않은 것은 정부가 인터넷 규제 이슈에 의사결정권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인터넷을 둘러싼 권력과의 전쟁 포럼. 왼쪽부터 수잔 크로포드 교수, 크리에이티브커먼즈 활동가 배수현씨, 전길남 교수, 윤종수 판사, 박재천 교수.
 

크로포드 교수는 “스팸과 보안이 이슈였는데 한 사람이 스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예술이 될 수도 있고 보안 문제도 콘텐츠와 관계돼 있기 때문에 정부가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크로포드 교수는 “누가 무엇을 결정하느냐가 중요한데 미국 대표단은 정부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면서 “특히 이런 중요한 논의가 조그마한 방에서 이뤄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크로포드 교수는 “많은 민간 단체와 민간 회사들에서 인터넷 표준이 나오고, 항상 민간 사회와 함께 발전해 오며 그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등이 보장돼 왔다”며 “(국가가 통제하면) 인터넷이 세계를 연결하는 하나의 인터넷이 아니라 국가별로 분리된 인터넷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번 ITU 회의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석했던 박윤정 한국뉴욕주립대학교 기술경영과 교수는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박 교수는 “앵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면서 “미국이나 유럽이 반대한 것을 프리 인터넷과 규제된 인터넷의 프레임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물론 오픈 인터넷이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프레임도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화 프레임과 규제 프레임을 구분해서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다.

박 교수는 “미국의 기존 모델을 수정할 것인가 유엔으로 가져가서 국제화 모델로 만들 것인가의 갈등이 있었다”면서 “유럽은 미국과 같이 가야 한다고 지지한 것인데, 한국은 중국과 동맹도 중요하고 동북아 정세를 감안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인권이라는 이슈도 왜곡되고 있다”면서 “가장 핵심은 개발도상국과 미국의 갈등인데 개발도상국들은 인터넷 접속권은 기본권이기 때문에 명시해 달라는 입장이고 미국은 유추해석해서 논의 자체를 근절시켰다”고 설명했다. “국가 vs 기업, 규제하느냐 마느냐의 이슈 뿐만 아니라 미국 vs 세계, 미국 주도의 인터넷의 대안으로 세계적인 새로운 거버넌스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박 교수는 인터넷은 자유롭고 개방돼야 한다는 미국 등의 주장에 인터넷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패권주의가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크로포드 교수는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의 경우 제한된 권리만 갖고 있다”면서 “ITU 또한 이와 같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 교수도 “핵심은 스팸이 됐든 사생활 침해가 됐든 결정하는 과정에서 주체가 정부만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화 정도와 ITRs 찬반투표 여부 비교. 우리나라는 민주주의가 완성된 나라 가운데 유일하게 찬성표를 던졌다. 왼쪽부터 민주화 정도, 붉은 색이 찬성표를 던진 나라, 연두색은 반대한 나라.
 


박 교수는 “ITRs에 대해 흑백논리로 접근하고, 선진국은 서명 안하는데 한국이 왜 서명했냐고 의문을 품는데, 개인적으로 만난 유럽 협상 대표단들은 내용 자체가 거부감이 드는 내용은 없지만 미국에 따라가기로 했기 때문에 서명 안하는 걸로 입장 정리한 거라고 말한다”면서 “오픈 인터넷을 만들고 규제 인터넷을 만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화 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협의의 출발점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핵 파워를 한 국가가 독점하는 것이야말로 불편한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사회를 본 정보법학회 소속 윤종수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사람들은 인터넷이 중국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놓을까 예상했지만, 결국 중국이 인터넷의 미래도 바꾸는 상황이 돼 버렸다”고 평가했다. 강민구 서울고법 판사는 “인터넷은 가장 민주적이며 비중앙집권적인 매체”라면서 “지배구조의 종류가 속성을 해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판사는 “인터넷 통제권은 반지의 제왕의 절대반지”라고 강조했다.

이날 포럼에서는 정부 주도의 인터넷 거버넌스가 향후 어떤 변화를 불러올 것이냐에 관심이 집중됐으나 현재로서는 이야기할 단계라는 다소 모호한 전망에 그쳤다. 끔찍한 디스토피아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도록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는 이야기다. 다만 전 교수는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바로 튀어 나가겠지만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죽는 줄도 모르고 헤엄치다가 죽게 된다”면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것도 그런 끔찍한 변화”라고 설명했다.

전 교수는 “Honeymoon is over(신혼은 끝났다)”는 말로 결론을 내렸다. “자유와 개방의 인터넷 역사 40년을 맞는 시점에서 앞으로 40년은 너무너무 힘들 거고 이혼도 못하고 같이 싸우면서 고생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크로포드 교수는 “다행이라면 인터넷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가 이제 막 시작됐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크로포드 교수는 “인터넷의 자유가 위험에 처해있다”면서 “올해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사이버스페이스 총회와 내년에 부산에서 열리는 ITU 전권회의에서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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