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여성대통령’이란 타이틀 제 값 하려면…
‘첫 여성대통령’이란 타이틀 제 값 하려면…
“성평등·민주주의 구현 로드맵 있어야”… 여성노동정치행동 “여성공약 이행 여부 모니터링”

<박근혜, 대한민국 첫 여성 대통령> (중앙일보) 
<박근혜, 사상 첫 여성대통령> (경향신문)
<대한민국 첫 여성대통령> (동아일보)

20일자 아침신문 헤드라인이다. 아침신문들은 하나같이 박근혜 당선인이 첫 여성대통령임을 강조했다. 기사 제목에는 ‘첫 여성대통령’이라는 말이 공통적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서울신문과 동아일보는 이날 1면 기사 제목이 <대한민국 첫 여성대통령>으로 똑같았다. 이날 YTN은 박근혜 당선인 관련 보도를 하면서 ‘여성대통령 시대’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여성인 대통령이 처음으로 당선됐으니 ‘첫 여성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박 당선인에게 ‘여성대통령’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는 여성계 내에서도 시각이 엇갈린다. 

   
▲ 동아일보 20일자 1면 기사.

여성운동 진영의 인사들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지난 13일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유권자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이날 선언에는 여성계원로 이이효재 여성학자를 비롯해 70년대 여성노동운동가 박순애씨(원풍모방 노동조합동지회), 손미희 전국여성연대 공동대표 등 여성계 인사 130인이 참여했다.

1970년대부터 30년 넘게 여성차별에 맞서온 이들은 “여성대통령의 탄생을 간절히 염원해왔다. ‘최초의 여성대통령’이라는 의미와 무게 역시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그러나 더 이상 ‘여성대통령’의 의미가 훼손되는 현실을 참을 수 없다”며 새누리당과 박근혜 후보의 ‘준비된 여성대통령’론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박 후보와 새누리당이 ‘준비된 여성대통령’임을 자임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임승차”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박 후보에게 “여성들이 억울하게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에서 울부짖을 때, 가족법을 개정하고, 성폭력·가정폭력방지법을 만들 때, 출산휴가·육아휴직을 달라고 외칠 때 어떤 발언을 하고 어떤 실천을 했느냐”고 물었다.

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가 20년 넘게 계속되는 동안 누구와 함께 있었느냐”고도 질문했다. 130인은 “여성들의 고통과 투쟁에 참여한 적이 없는 박근혜 후보가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자임하는 것은 여성운동의 역사와 성과에 무임승차하는 몰염치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새누리당의 전신 한나라당이 2010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만든 선거 홍보 동영상은 여성계를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다. 동영상에는 “여자는 뉴스를 바퀴벌레 다음으로 싫어해요. 여자는 아는 거 쥐뿔 없어요”라는 내용이 담겼다.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은 2002년 7월 12일 장상 신임 총리서리 임명을 놓고 “대통령 유고시 국방을 모르는 여성 총리로는 직무수행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조선일보는 그러나 20일자 12면 <“첫 여성 대통령, 권위적 통치 아닌 보살피는 정치 하기를”> 기사에서 여성계가 19일 박근혜 후보 당선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미국·일본·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도 아직 탄생하지 않은 여성 대통령이 나온 것은 국가 이미지를 한층 높이는 데 기여할 역사적 사건”이라고 환영했다고 전했다.

   
▲ 조선일보 20일자 12면 기사.

김정숙 여성단체협의회장은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국제 통계에서 여성 지위가 낮은 것으로 나오는데, 박 후보의 당선은 여성 인권과 지위가 향상될 것이라는 신호탄을 국제사회에 보내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며 “여성 특유의 리더십으로 국정을 펼치면 그동안 권위적이던 정치를 섬세하고 보살피는 정치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자 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은 “여성대통령 탄생은 다른 어떤 자리에서 여성 1만명을 앉히는 것보다 우리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통치권자가 여성이라는 점은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은 물론 한국을 모델로 삼고 있는 여타 개도국에도 신선한 충격과 자극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박봉정숙 한국여성민우회 대표는 20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박근혜 당선인은 성평등 관련 정책을 고민하거나 펼쳤던 분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것에 대해서 후보 당시에도 얘기가 나왔다”며 “여성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지 성평등, 민주주의,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어떻게 펼쳐가느냐를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선인의 정치적 행보와 법률안을 봤을 때 회의적이긴 하지만 당선이 됐으니 기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우리 사회의 성평등과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자기 로드맵이 있어야 (여성대통령으로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여성주의 일다의 박희정 편집장은 “한국사회의 여성운동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성장해 온 만큼 ‘독재자의 딸’로 아버지의 과오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박근혜씨가 대통령 후보가 됐다는 것에 여성운동 진영에서 큰 우려의 목소리를 냈던 것이 사실”이라며 “성평등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성숙 정도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말했다.

박 편집장은 특히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사회에 제한 없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외압으로부터 독립된 언론, 표현의 자유가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근혜 18대 대통령 당선인.
©CBS노컷뉴스

박근혜 당선인은 여러 차례 ‘어머니의 마음’으로 민생을 돌보겠다고 밝힌 바 있다. 박 편집장은 그러나 “여성대통령은 ‘어머니’일 필요가 없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일방적인 돌봄을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대통령이 가져야 할 자세를 ‘어머니의 마음’에 가두는 것은 오히려 여성들의 능력과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효과를 갖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여성노조로 구성된 ‘여성노동정치행동’은 20일 성명을 내고 박 당선인에게 “약속을 지키는 국민의 심부름꾼이 되라”고 주문했다.

여성노동정치행동은 박 당선인이 약속한 여성공약들을 일일이 나열하며 구체적인 실현 방안을 제안하는 한편 공약이 이행되는지 꾸준히 모니터링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박 당선인의 △여성 장관 및 정부위원회 내 여성위원의 비율 단계적 대폭 확대 △공공기관 여성관리자 목표제 도입 등 ‘2017년까지 미래 여성인재 10만 양성’ 공약에 대해 “구체적인 수치가 없다”며 “각 항목에 대한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고 단계별 전략에 대한 구체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또 △출산 후 1개월간 남성 출산휴가 장려(100% 유급) △영아 종일제 돌봄서비스 확대 등 종합육아지원대책에 대해서는 관련 예산 확보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고 남성 출산휴가 장려 정책을 법제화할 것을 촉구했다.

박 당선인의 ‘특수고용직 근로자 현실에 맞는 산재보험·고용보험제도 설계’ 공약에 대해서는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 방안에 대한 전향적 검토를 주문하는 한편,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해 5년째 투쟁하고 있는 88CC 경기보조원과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박희정 일다 편집장은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가 낮은 나라에 속하고 비정규직, 낮은 임금 등 여성고용의 질이 날로 저하되고 있다”며 “여성들이 차별없이 노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은 성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가장 핵심적인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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