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대선후보 TV토론에서 돌연 등장한 ‘다카키 마사오’, 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일본장교 시절 창씨개명한 이름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 장교가 됐다는 그의 일제시대 친일행적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특히 그의 '혈서' 작성 사실을 가장 먼저 추적한 이가 박정희론자로 평가받아온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라는 점도 새삼 관심을 낳고 있다.

지난 4일 밤 열린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상대로 “외교의 기본은 주권을 지키는 것”이라며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이름은 박정희이다. 4대 매국 한일협정 밀어붙인 장본인, 뿌리는 속일 수 없다. 친일과 독재 후예인 박근혜 새누리당은 1년 전 주권을 팔아넘겼다”고 비판했다.

이 후보의 이 같은 발언은 삽시간에 박정희의 이력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불러왔다. 각종 포털사이트의 검색어 상위에 랭크됐다.

박정희의 일제시절 창씨개명한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것이 사실로 입증된 것은 지난 2005년 2월 그의 병적기록표가 공개되면서였다. 1945년 3월 박정희의 형 박동희(高木東熙) 명의로 경상북도 구미면사무소에 제출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사진)를 보면 박정희는 본적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인 ‘高木正雄’(다카키 마사오)로 기재돼 있다.

이와 함께 일본육사 57기 졸업생 앨범에도 박정희의 이름은 高木正雄(다카키 마사오)로 쓰여있다고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이 5일 전했다.

 

   
1945년 3월 박정희의 형이 구미면사무소에 제출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 박정희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으로 기록돼 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이 같은 공문이 발견되기 전부터 이런 내용을 기록한 당사자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현 조갑제닷컴 대표)였다. 조 대표는 지난 1992년 저술한 ‘박정희 1:불만과 불안의 세월’(까치)에서 박정희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박정희는 입교(1940년 4월)한 다음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다. 군관학교에서는 한국인 생도들에게 1주일간의 휴가를 주며 고향에 가서 창씨개명을 해오라고 시켰던 것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퇴교시킨다는 명시적 협박은 없었으나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 동기생들은 말한다. 高木正雄의 木(목)은 박에서, 正(정)은 정희에서 따온 것이다”.

무엇보다 일제시대 교사였던 박정희가 돌연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 배경에는 일사봉공·멸사봉공의 충성을 맹세한 ‘혈서’가 등장한다. 이정희 후보의 TV토론 발언에도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 장교가 된…뿌리는 속일 수 없다”는 대목이 거론됐다. 과거 수많은 박정희의 ‘혈서’설이 있었으나 지난 2009년 11월 그 증거의 하나가 공개됐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에 실린 기사였다. 박정희 ‘혈서’에 대한 기사 제목은 ‘혈서 군관지원(血書 軍官志願)’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계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하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 사무처장은 이를 두고 최근 펴낸 에세이집 ‘친일·숭미에 살어리랏다’에서 “군관학교 입학자격이 안 되자 무리를 해서라도 입교를 자진 희망했으며, 스스로를 ‘일본인’으로 자처하면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을 밝혔다”며 “이를 위해 목숨을 다해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도 약속했다. 최종적으로 이를 ‘혈서’로 써서 각종 구비서류와 함께 군관학교에 보냈다고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친일파는 없을 것이며, 이보다 더한 충성 맹세도 없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만주신문 1939년 3월 31일자

교사 박정희가 어떻게 ‘혈서’까지 쓸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의문에 싸여 있다. 박정희의 혈서에 대해 가장 먼저 조사한 이는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이다.

그는 1992년 낸 그의 책 ‘박정희1…’과 2009년 2월 조갑제닷컴에 올린 글에서 박정희의 혈서 결의과정을 묘사했다. 혈서를 객관적으로 알고 있던 박정희의 대구사범학교 동료교사 유중선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조갑제 대표에 따르면 조씨와 1998년 만났다는 유중선씨는 “1938년 5월경 숙직실에서 같이 기거하면서 박 선생이 ‘저는 아무래도 군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제 성격이 군인 기질인데 문제는 일본 육사에 가려니 나이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주군관학교는 덜 엄격하다고 하지만 역시 나이가 걸립니다’라고 말했다”며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이 환영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취할 것인가’ 연구하다 내가 문득 생각이 나서 ‘박 선생,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면 어떨까’라고 했다. 그는 즉각 찬동했다”고 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연합뉴스

박정희는 즉시 행동에 옮겨 바로 옆에 있던 학생 시험 용지를 펴더니 면도칼을 새끼손가락에 갖다 대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낸 뒤 핏방울로 시험지에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써서 접어서 만주로 보냈다고 유씨가 증언했다는 것.

유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혈서가 (만주)신문에 보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고 말했다고 조 대표는 전했다.

이를 두고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 사무처장은 “그동안 내가 박정희의 일제시대 창씨개명 등 친일행적에 관해 책 10권을 써도 대중에 알려지지 않던 것이 방송에서 한 번 언급되면서 전국에 관심사가 됐다”며 “박근혜 후보와 지지자들은 그동안 박정희의 친일행적 등 어두운 경력은 눈감은 채 ‘경제성장’만 강조하며 박정희를 지도자라 부르짖어왔으며, 박 후보는 이제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와 국민 절반의 지지를 받은 현실이에서 이번 ‘다카키 마사오’ 열풍은 박정희의 실체를 전국민에 알려준 좋은 계기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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