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어느 날, 국민 투표가 있었고 그 날은 임시 공휴일이어서 아이들은 신이 났다. 얼마 후 국민 학생들은 가슴에 이름표와 함께 ’10월 유신’이라고 새겨진 리본을 달고 다녀야 했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리본을 옮겨다는 걸 깜빡 잊으면 주번에게 걸려 교문 앞에서 벌을 서야 했다.

이 당시 학교에서는 반공교육을 통해 북한의 선거는 100% 투표율에 100% 찬성이기 때문에 절대 공정선거라고 할 수 없고, 북한은 국민투표 제도를 악용해 자기 정당성을 홍보하는 독재국가라고 가르치고 있던 시기였다.

10월 유신 찬반에 대한 국민 투표 결과는? 91.9%의 투표율에 91.5%의 찬성. 그럼 유신정권은 어떤 정권? 당연히 독재 정권! 학교에서 배우는 반올림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 수치나 이 수치나 거기서 거기 아니던가?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인 KMDb 사이트(http://kmdb.or.kr)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추천 VOD 1위, 최신 평점이며 가장 높은 평점 받은 작품 가장 앞 자리에 있는 영화는 <바보들의 행진>이다. “암울한 시대를 지냈던 70년대 젊은이들을 감각적이면서 불안한 카메라와 함께 낭만적이고도 자조적으로 풀어놓은 ‘영상시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하길종 감독의 1975년 작품 <바보들의 행진>은 유신 시대에 대한 청춘 스케치이다.

그리고 그 <바보들의 행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미완의 혁명’ 4.19 세대였던 하길종은 한국영화사에 ‘미완의 감독’으로 남아있다. 영화의 천국 미국 UCLA에서 전과목 A를 받고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함께 동급생 가운데 가장 우수한 인재로 꼽혔던 하길종 감독은 영화 속 영철의 입을 빌어 ‘나는 바보, 병신, 쪼다, 여덟 달 반’이라고 자조한다.

실제로 그의 영화 이력은 여덟 달 반이다. 외부의 검열이나 상업주의와의 자포자기적 결합으로 인해 하길종의 영화세계는 감독의 의도와 정신을 제대로 영사하지 못하고 시대적 배경과 감독의 이력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리고 감독과 관련된 일화들을 통해서 읽혀질 때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70년대는 군사정권의 국가주도 근대화와 한국적 민주주의를 빙자한 정치적 탄압으로 온 나라가 거대한 감옥이었던 시대였다. ‘근대화’의 강령은 전통을 깡그리 쓸어버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뿌리로부터 부정하기를 강요했으며, ‘한국적 민주주의’의 강령은 전체주의의 물결 속에 개인의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을 억압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이민’을 떠나던 시절, 하길종은 꽤 전망이 밝은 미국 생활을 포기하고 스스로 감옥으로 돌아왔고, 그 시기는 한국영화사가 60년대의 절정기에서 참혹한 암흑기로 접어들던 시절이었다.

당시 영화계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호스티스 영화’나 ‘무협영화’ 아니면 외화수입권을 보장하는 ‘반공영화’나 ‘문예영화’를 양산하면서 마침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던 TV의 ‘명화극장’으로 관객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유학 시절 하길종 감독은 <어느날>, <나의 환자>, <병사의 제전> 등 언더그라운드 실험영화를 제작했다. 이런 실험영화에 대해 하길종은 자신의 논문에서 "‘뉴 시네마’란 지역적인 것도 아니거니와 수법상의 개혁을 위한 운동도 아니다. 영화의 본질을 찾고자 하는 세계 영화인들의 정신사적 운동이다. 구세대의 모럴과 전통에 반역하는 모험이야말로 뉴 시네마 작가들이 지향하는 길이다." 라고 설명한다.
 

하길종 감독은 인종차별, 매카시즘, 20세기 서구 문명에 대해 ‘뉴 시네마’라는 깃발을 들고 무정부주의적인 시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실천적으로 저항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아나키스트였던 것이다.

귀국해서 만든 첫 작품 <화분>, <수절>, <한네의승천> 등이 감독 하길종의 영화미학을 보여주는 작가주의적 예술영화라고 본다면, <바보들의 행진>을 비롯해 <여자를 찾습니다>, <속 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는 상업성을 의식한 대중영화로 볼 수 있다.

작가주의적이든 대중주의적이든 그의 영화는 모두 검열에 의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 당국의 가위질이라는 외부로부터의 검열과 대중을 의식한 감독 내부로부터의 검열을 통해 우리는 하길종 영화의 ‘미완의 상태’만을 볼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검열은 작품을 훼손했고, 감독 내부로부터의 검열은 감독 자신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훼손시켰다. 작가주의적 작품은 검열의 상처뿐 아니라 대중으로부터의 외면이라는 상처를 감독에게 안겼고, 대중주의적 작품은 감독의 영화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자연인으로서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바보들의 행진>은 하길종 감독이 잇따른 실패 끝에 대중주의적 전환을 시도한 첫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원작의 주인공 병태와 나란히 자신의 페르소나로서의 영철을 등장시킴으로서 상업적 성공뿐만 아니라 작가적 성취도 동시에 이루고 있다. 물론 이 작품도 다섯 번의 검열에 의해 30분이나 잘려 나가는 수난을 피하지는 못했다.

실천적 지식인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시대적 방관자로서의 죄인인 ‘피고’로 생각했던 감독의 영화답게 <바보들의 행진> 에 등장하는 ‘진짜 대학생’ 배우들이 연기하는 대학생들 속에서 우리는 당시의 치열했던 대학가의 현실을 실천적 전선에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장발 단속을 피해 달아나고, 책 대신 테니스 라켓을 들고 다니고, 말을 더듬고, 공부보다는 미팅이나 음주, 연애에 몰입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 인텔리겐차가 되지 못하는 정체성 부재의 자조와 고민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에 의해 영유된 전쟁 기계로서의 상징인 축구 경기에서 엉뚱하게 던져지는 운동화나, 조국근대화의 상징인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를 힘겹게 헤쳐 나가는 자전거를 통해 영화는 도발하되 저항하지 못하던 70년대 청년 문화의 표상을 비춰 보여준다.

영화 초반 플라톤의 공화국에서 추방당해야 할 존재로 지목된 시인은 끝내 영화 말미에 스스로를 내던져버린다. 잘 나가는 상대가 아니라 취직도 어려운 철학과를 다니는 병태와 영철은 학교를 떠나 입영열차를 타거나 아예 세상 끝으로 투신함으로써 전망 부재의 현실과 좌절한 청춘의 모습을 고스란히 아무런 허세 없이 보여준다.

질식할 것 같은 시대에 ‘개인’으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음을 이토록 생생히 보여주는 영화는 흔치 않다. 그리하여 하길종이 한국영화에 남긴 것은 저항정신과 비판정신뿐 아니라 ‘실존적 개인’으로서는 헤쳐 나갈 수 없는 감옥의 현실에 대해 직시할 수 있는 시선이다.

자전거는 오직 ‘자전거’일 뿐인가? 영철은 주장한다. ‘이건 자전거가 아니라 내 자가용이라니까요.’ 생각도 판단도 자유롭게 할 수 없던 시절이 이토록 지속되는 수상한 시대에 <바보들의 행진>은 아직도 고전의 자리에 머무는 대신 모든 권위에 도전하면서 청춘을 압살하는 시대의 폭력을 조롱한다.

유신의 망령이 어른대며 부활을 꿈꾸는 이 시기까지 여전히 <바보들의 행진>을 VOD로 찾아보고, 높은 평점을 매기는 관객이 이토록 많은 것은 그 시기의 좌절과 무력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진저리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서야 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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