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원로 역사학자 강만길 선생의 믿음입니다. 그 낙관의 힘 때문일까요? 최근 뵌 선생은 여든의 춘추에도 술잔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건강하시더군요. 물론, 선생은 역사가 직선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나선형으로 발전할 때도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든 한 바퀴 돌고 나면 더 높게 올라가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김형. 공연한 조바심일까요. 저는 우리가 나선형의 오른쪽을 다 돌았는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박근혜 후보와 그를 두남두는 윤똑똑이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박근혜는 기자회견을 열고 “5ㆍ16과 유신, 인혁당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사과를 표명했습니다. 언론들은 박 후보가 기존 생각을 크게 수정했다고 풀이했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역사관 수정

하지만 어떤가요. 역사를 보는 눈이 보름 사이에 “크게 수정”될 수 있는 걸까요? 박근혜는 사과 2주일 전에 박정희가 인혁당재건위 관련 8명을 전격 처형한 야만에 대해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라며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언죽번죽 말해 거센 비판을 받았지요. 박근혜는 정계에 복귀한 뒤 지난 15년 내내 “5·16은 구국혁명”을 박정희를 적극 비호해왔습니다. 기실 박근혜가 정계에 복귀하며 밝힌 이유도 ‘박정희 유업’입니다.

다 알다시피 역사관을 수정한 2주일 사이에 박근혜의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새누리당 내부에서 대선을 이기려면 ‘역사관 수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솔솔 흘러 나왔습니다. 박근혜의 사과는 바로 그 요청에 응답입니다.

김형, 그런데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와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박근혜의 사과를 높이 평가하더군요. 나름대로 ‘아량’을 과시하고 참모들의 조언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과연 그렇게 구렁이 담 넘어가듯 역사관 수정을 바라보아도 좋은 걸까요? 저는 두 사람의 그 평가를 보며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직후 전두환-노태우 석방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강력히 요청한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오히려 상황을 정확히 읽은 사람은 대선 출마를 밝힌 검사출신 이건개이더군요. 이건개는 박근혜의 사과에 대해 “표를 얻기 위해 마지못해 한 것”이라면서 “5ㆍ16에 대해 공을 더 부각시키면서 과를 발표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건개로서는 뒤쪽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었겠지만, 저는 앞의 말에 눈길이 더 쏠립니다.

문제는 한국의 신문과 방송입니다. 박근혜가 표를 얻기 위해서일망정 사과를 표명한 ‘상처’와 ‘피해’들에 대해, 당시 언론은 어떻게 보도했던가요? 박정희 정권 내내 찬가를 읊어대던 신문들, 올곧게 비판했던 기자들의 목을 치고 끝내 복직을 거부하는 신문들이 박근혜의 사과에 보이는 반응들은 차라리 ‘연구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박근혜가 5·16쿠데타를 “국민과 역사에 맡기겠다”고 했을 때, 그 발언이 “역사 앞에 겸손하고 정직한 표현”이라고 적극 찬양했던 국립대학의 어느 교수는, 또 그 교수의 발언을 언제나 무게 있게 실어주는 신문들은 박근혜의 사과 앞에서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아니, 저들에게 논리적 일관성을 기대하는 게 애초부터 잘못이었을까요.

대통령 후보가 2주일 사이에 역사관을 바꾸는 기상천외한 풍경은 세계 정치사에 남을 희극입니다. 그 해괴한 광경을 긍정적으로 보도한 언론은 세계 언론사에 남을 우스개이지요.

다행히 박근혜의 사과에 진정성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 검증은 박근혜로서도 ‘좋은 기회’이겠지요. 바로 아버지 박정희가 남의 재산을 강탈해서 설립한 정수장학회가 그것입니다. 정수장학회가 소유하고 있는 부산일보에서 언론자유 투쟁이 벌어지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정수장학회는 물론, 육영재단, 영남대 재단을 비롯해 박정희 집권 시기에 부당하게 챙긴 재단들을 말 그대로 공공화한다고 약속해야 ‘상처와 피해’를 들먹이며 사과한 박근혜의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언론 또한 마땅히 그런 요구를 의제로 설정해서 여론화해야 옳지 않을까요.

지금 언론이 던져야 할 질문

그럼에도 세 신문사와 세 방송사가 마땅히 제기해야 할 의제를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 야당 후보들조차 사뭇 통 크다는 듯이 박근혜의 사과를 받아들이는 모습은 생게망게합니다.

김형. 정치적 계산으로 역사관을 수정하는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말살에 쇠살인 ‘역사관 정리’를 높이 평가하는 자칭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는 언론’이 그 권력과 유착할 때 이 나라는 어디로 갈까요?

저 역사를 조롱하는 대통령 후보와 그를 두남두는 언론 앞에서 원로 역사학자의 믿음을 다시 살펴봅니다. 역사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할 때, 혹 전제가 필요한 건 아닐까요? 그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라는 조건이 그것입니다.

(건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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