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오카모토 미노루가 기시 노부스케를 만난 때는 1961년 일본 수상관저 만찬회에서였다. 박정희는 잘 알려진 대로 다다키 마사오로 개명했지만 민족색을 완전히 지우기 위해 한 차례 더 개명했다. 그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다.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의 회상록에서 “내가 박정희 씨와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박정희 씨의 얘기는 이런 거였어요. ‘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인데, 그때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는 겁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박정희의 발언은 기시의 자존심을 자극해 마음을 흔드는 기특한 격정 토로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박정희 사후에도 그의 경제정책 성공을 가장 큰 공적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사실 당신이 잘 해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며 놀라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이 둘의 인연은 일본 제국주의가 낳은 기형아, 만주국에서 시작됐다. 만주국의 통제경제 실험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기시 노부스케의 아이디어는 훗날 박정희의 개발독재에서 재현됐다. 뿐만 아니라 만주국 인맥은 박정희의 독재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박정희의 '친일행적'은  단순히 친일 군인이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쿠데타 이후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사회상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국에서 실험했던 '통제경제, 통제 사회'였다는 게 본질이라는 것. 강상중 도쿄대 교수와 현무암 훗카이도 대학 교수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이다.

우선 만주국의 탄생부터 살펴보자. 당시 일본은 제국 확장의 중요한 거점으로 ‘만주’ 지역을 주목하고 마침내 만주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 계책을 꾸미게 된다.  결국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만주국의 이념으로 일본, 조선, 한, 만주, 몽고의 이 다섯 민족이 평등하게 공존하며 산다는 ‘오족협화’와 구미제국주의의 패권주의에 대항해 동양의 이상향을 실현한다는 ‘왕도낙토’라는 허구를 내세웠다.

이런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는 마치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인식됐다. 모든 구성원들에게 평등한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다는 만주국이 성립되자 만주는 희망의 땅으로 마침내 한반도를 열광시켰다.

박정희도 교직을 버리고 1939년 10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고, 만주로 가서 황국 군인이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원래 박정희는 연령, 국적, 혼인관계 등 입학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한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의 굳은 결심”을 피력하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함, 충성을 다할 각오”라는 혈서를 만주국 치안부에 보낼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 교장인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이 말했던 것처럼 “천황페하께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면에서 그는 일본인보다도 훨씬 일본인답게” 행동했다. 그는 이어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관동군에 배치됐고 1944년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 중위로 진급했다. 

한편 만주국은 입법, 사법, 행정, 감찰, 고시 등 5권 분립을 주창했지만 실제로는 ‘총무청 중심주의’라는 독재적인 중앙집권제가 통치양식으로 정착돼가고 있었다. 이런 만주국에 기시 노부스케가 온 것은 1936년이었다. “군인들로부터 산업행정을 넘겨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는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해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계획을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됐다.

하지만 일본이 패전국으로 전락하면서 이 둘의 꿈은 무너진다. 박정희는 이른바 ‘여수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구형받는다. 기시 역시 A급 전범으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제국의 귀태(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의 조어로 ‘태어나서는 안 될’이란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들은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한다.

또한 ‘만주인맥’들이 그들을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A급 전범용의자를 불기소로 석방되기까지 감옥 안팎에 만주 인맥의 그림자가 어른거렸고, 박정희 역시 그의 만주군관학교 선배이자 육군본부 정부국장 백선엽 등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이후 기시류의 통제적인 경제계획을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박정희 정권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서 한국의 산업구조를 수입대체형에서 수출주도형으로 바꾸고, 나아가 중화학공업화로 발전시켜 나갔다.

박정희는 농촌 문제에 대해서도 기시의 조언을 따랐다. 기시는 만주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으로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농업이다. 농촌이 확고하게 서지 않고는 제대로 될 리 없다”고 박정희에게 조언했다. 박정희는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국민운동을 벌이고 농촌진흥청을 설립하는 등 농촌진흥에 착수했다. 또한 정신혁명의 주창한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박정희의 정신개조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도 ‘만주인맥’ 이선근이다. 이선근은 만주국협화회 전국연합회의회의 ‘조선계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만주국협화회는 만주국의 건국정신을 구현할 ‘왕도낙토’와 ‘오화협화’의 이념을 재만 민족들에게 침투시켰고, 만주국의 기초를 공고히 다지기 1932년 설립된 실천단체이자 교화단체이다.

박정희의 ‘역사선생’이었던 이선근은 ‘민족혼의 진작과 지도이념의 정립’, ‘유신이념의 사상적 체계화’, ‘국가지도이념(유신·새마을·통일·안보)의 확립’ 등을 표방하며 설립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대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이 만주국 제국 군인과 협화회 협의원은 한국 사회에 만주식 의례를 적극 도입했다. 전사자에 대한 1분간의 묵도, 행진, 시국강연 청강, 선전영화 시청, 포스터 작성, 학생웅변대회, 집회와 대운동회 참가 등의 국가의례 등은 1930년대 만주국의 국가행사였다.

예를 들어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재건체조’라고 해서 시작한 라디오 체조의 모델은 만주국의 건국체조였다. ‘건국정신 함양을 위해’ 만주국 교육청이 주최한 학생웅변대회는 수십 년 후 한국에서 실시되는 학생웅변대회의 원형이었다. 또한 ‘가정의례준칙’은 낭비와 허례허식을 삼간 ‘협화식 결혼식’을 상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박정희와 기시의 인연은 박정희가 기시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실제 한일 정치에서 그들의 인연은 이어졌다. 박정희는 첫 만남이 이뤄졌던 1961년 이전부터 기시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그는 사신을 보내 “금후 재개하려는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구의 강인한 유대가 양국의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했다.  

그 후 한일협력위원회나 박 대통령의 취임식 때마다 방한했던 기시는 한일 간의 ‘핫라인’ 역할을 맡았다. 이들의 유대는 한일관계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빛났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일본 여론이 들끓자 한일 정기각료회의가 무기한 연기됐다.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막 제시한 시점에서 이는 큰 타격이었다. 일본의 경제원조액 결정을 확인하면 그에 따라 익년도 예산을 짜는 상황이라서, 무기한 연기로 예산을 편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한일 간의 정치적 타결을 꾀하기 위해 ‘거물 특사’로 파견된 이가 바로 기시 노부스케였다. 그야말로 이들은 정치적 동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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