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19일 서울 충정로 구세군 아트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는 배석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의 얼굴이 눈길을 끌었다. 이 전 부총리가 안철수 캠프에 합류했다는 소문은 일찌감치 나돌았으나 공식적인 행사에 동행한 것은 처음이다. 이 전 부총리는 박근혜 캠프에 합류한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에 견줘 안철수의 경제 멘토로 불린다.

이헌재 전 부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 초대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과 경제 부총리 및 재정경제부 장관을 역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했다. 정권이 바뀐 뒤 노무현 전 대통령 밑에서도 경제 부총리를 맡아 신용카드 사태를 해결했다. 위기관리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반면 관치금융의 화신이라거나 모피아(재정경제부와 마피아의 합성어)의 대부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엇갈린다.

이 전 부총리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안 원장은)개혁 성향이 강해 보이지만 급진적인 경제정책을 펴지는 않을 것”이라며 “시장 경쟁을 바로 잡는 과정에서 재벌집단을 정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이 안 원장의 경제 멘토라는 사실을 공식화하는 동시에 안 원장이 과격한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자신과 같은 합리적인 시장주의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 전 부총리는 최근 출간한 ‘경제는 정치다’에서 “안철수 현상은 그를 포함한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던 변화에 대한 열망이 폭발한 것”이라며 “기존 시스템과 타성에 젖은 사람들로는 우리 사회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요구인 셈”이라고 진단했다. 정치권에서는 이 노골적인 헌사를 구직 선언으로 받아들였지만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는 “다시 공직에 출사하지 않는다는 개인적 원칙을 세워 정치권에 참여할 뜻이 없다”고 선을 그은 바 있다.

안철수와 이헌재의 조합은 언뜻 낯설지만 두 사람의 발언에는 동일한 기조가 발견된다. 안 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경제 민주화의 방향을 묻는 질문에 “근본적 접근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서 “바꿀 수 있는 것부터 점진적으로 바꿔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가 ‘경제는 정치다’에서 “개혁은 뜨뜻미지근할수록 좋다”면서 “은근히 스며들었다가 나중에 보니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가 성공 확률이 높다”고 밝힌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안철수와 이헌재의 결합은 안철수라는 신인 정치인의 정체성과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전 부총리는 한국 경제가 겪고 있는 구조적인 병폐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안 원장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이 전 부총리와 손을 잡았다면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고 알면서도 손을 잡았다면 안 원장이 말하는 개혁의 실체를 다시 평가해야 할 수도 있다. 진보진영과 거리를 두면서 합리적인 시장경제를 말하는 안 원장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안 원장 입장에서는 정치나 행정 경험이 전무한 그가 국정을 운영하려면 그의 손발이 돼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겠지만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패가 모피아 관료들의 저항 때문이었고 그 중심에 이헌재 사단을 비롯한 보수 기득권 계층이 있었다는 사실을 돌아봐야 한다. 안 원장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강조했던 디지털 마인드와 수평적 리더십을 여러차례 정권을 거치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회한 관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도 의문이다. 정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흔히 이 전 부총리가 신용카드 사태를 해결한 것처럼 알려졌지만 1999년 4월, 신용카드 현금 서비스 한도를 폐지한 사람이 바로 이헌재다. 그해 8월에는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400개가 넘는 금융기관을 퇴출시켰고 재계 2위의 대우그룹을 포함해 수많은 부실기업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방식으로 처리했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과 부채비율 200%를 맞추지 못하는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그 과정에서 모두 도태됐다.

이 전 부총리는 외환은행 불법 매각에도 책임이 있다. 론스타가 금감위의 편법 승인을 얻어 외환은행을 헐값에 사들일 때 이 전 부총리는 론스타의 법률 자문을 맡았던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고문으로 일했다. 외환은행 노동조합은 이 전 부총리가 론스타의 로비스트로 활동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외환은행 뿐만 아니라 제일은행과 한미은행 등의 매각 과정에 이른바 이헌재 사단이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이헌재 사단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이름으로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규제 완화를 주도했다.

조금 비약하면 IMF 이후 15년, 한국 경제의 변화는 이 전 부총리가 설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이후 우리나라 경제는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기업의 이익은 빠른 속도로 불어났지만 노동자와 저소득 계층의 고통도 비례해서 늘어났다. 부동산 거품을 키웠고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와 양극화도 더욱 확산됐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사실상 국유화됐던 금융기관과 제조업 기업들을 헐값에 매각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모피아 집단은 환율을 끌어올려 수출 대기업을 지원하고 국민들 세금을 풀어 물가를 잡는 이율배반적인 정책을 펼쳐왔다. 그게 그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천문학적인 규모의 한국은행 적자가 발생했고 통화안정증권과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을 발행해야 했다. 명백한 환율 조작이고 부의 강탈이지만 이에 대한 비판은 많지 않았다. 안 원장은 그 중심에 이 전 총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만약 그가 집권을 한다면 수출이 잘 돼야 경제가 산다는 경제 관료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은 “노무현 정부는 삼성과 재경부와 조중동에 고립돼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홍종학 민주통합당 의원도 “노 전 대통령의 최대의 패착은 재경부를 장악하지 못하고 모피아들에게 휘둘려 모피아들에게 경제를 맡겨 놓은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 비판의 핵심에 이 전 부총리가 있다는 건 공지의 사실이다.

   
 
 
안철수와 이헌재의 결합은 매우 위험하다. 안 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안 원장은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을 부정하면서 상식과 선의, 원칙을 이야기한다. 안 원장은 지금까지 정치의 바깥에서 정치를 비판했지만 그가 정치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상식과 선의, 원칙은 기껏해야 이헌재 같은 사람과 결합한다. 섣불리 판단하기 이르지만 그게 이제 막 실체를 드러낸 안철수의 한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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