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가 말하는 “역사”는 과연 어떤 역사인가?

지난달 고 장준하 선생의 유골에서 타살 흔적이 발견된 것은 박정희 반독재 운동의 첨예한 전선(戰線)에 섰던 장 선생의 유지(有志)가 오늘에까지 끈질기게 이어짐을 뜻하는 역사의 추동(推動)이다.

반면 장준하 선생 암살 37년이 지나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전면에 나서는 모습이란,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변형일 뿐 본질적으로는 박정희·전두환 등의 기득권세력이 한국사회 현실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 세력은 정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았다. 이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도 여실한 한계였다. 심지어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나와 아버지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반란이나 헌법을 유린한 ‘10월 유신’이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 그 판단은 “역사에 맡기자”고 말하는 식으로 왜곡된 역사인식은 더한층 노골적인 현실이 됐다. 

그럼, 박근혜가 말하는 역사는 과연 어떤 역사일까?

권력의 오만(傲慢)에서 일방으로 규정되는 ‘자의적 역사관’이다. 역사 이해에 대한 사실적인 기초나 준거(準據)란 중요하지도 않고, 권력이란 도저(到底)한 만용(蠻勇)에서 자기마음대로 해석되는 ‘역사관’이다. 아니? 무슨 ‘역사관’이라 말하기에도 너무 민망하다. 무고한 일반시민들을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간첩으로 내몰고 사법살인을 한 독재자 박정희의 딸은 법원 최종판결에서 국가가 죄를 지었고, 있지도 않은 '인혁당 간첩사건'은 무죄임을 천명했지만, 그에겐 법원 최종판결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란 박정희 개인이 국가위에 올라서서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겠다는 타이완(臺灣)식 장개석(蔣介石) 영구총통제나 일본의 제국주의시대유사천황제를 본 따 꿈꿨던 게 바로 정체다. 그 본질에서는 민주주의 체제에 반하는 반국가적인 체제이다. 박정희 내면에는 국가의 헌법체계나 민주주의란 권력의 도구이거나 허울뿐이었다. 그래서 박근혜의 일련의 발언도 바로 이것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국기를 흔드는 헌법 파괴적이고 반민주적인 발언들이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을 하겠다는 후보의 입에서 천연덕스럽게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박근혜에게 있어서 “역사”란 실체 없는 가공(架空)으로 얼마든지 만만하게 보이는 추상체의 관념으로의 “역사”다. 이는 곧 한국 역사의 정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한다. 

감히 정치권력을 매개로 역사까지 왜곡할 수 있다는 허망한 발상이란, 이 나라가 무엇으로 어떻게 세워지고 이어지는 역사의 나라인가를 박근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 역사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니 어떻게 역사의 진리나 역사의 진실을 듣고 볼 수가 있겠는가?

민족의 자존과 민주주의 실천을 향한 불굴의 역사 

자, 정작 한국역사를 보자. 한국의 역사는 일방적으로 비극만의 역사는 절대 아니다. 지난 100년 역사의 무덤을 거듭 다시 깨치고 일어나고 일어나던 불굴의 인간역사다. 우리 역사는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간으로의 존엄성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민초들이 불의에 저항하여 자기를 불태우고 불사른 반민족과 군사독재 반체제에 항거로 행동한 역사다. 지난 100년의 역사에는 어둠을 깨치고 일어난 역사적 사실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명박이 천황폐하의 알현에 머리를 조아린 일본이란 나라의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그런 역사가 여기 한국의 역사다.

임진년 전쟁의 민중들의 의병궐기와 이순신 장군, 구한말의 동학농민운동이 이를 말하고 있다. 3.1운동과 4.19 혁명, 80년 광주의 항쟁과 87년 6월 시민혁명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비극의 역사지만 일방적으로 당하고 쓰러지기만 한 역사가 결코 아니며 자유를 향한 적극적인 투쟁의 역사란 말이다.

이렇듯 이 나라의 역사는 우리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 나라를 세운 역사다. 이 나라는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 군사독재의 폭력과 혼돈으로 부터 무릎을 꿇거나 굴종하지 않고 일어나 힘차게 걸어 온 인간들의 역사다. 우리 한국의 역사는 너무나도 많은 시련들을 겪고 수난으로 점철된 역사지만 위대한 인간들 승리의 역사인 것이다.

‘압록강을 넘어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역사는

최근 나는 ‘밝은 눈’으로 우리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정치·문화 비평을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기도 한 소설가 김갑수의 소설 ‘압록강을 넘어서’를 단숨에 읽었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 100년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소설가 김갑수는 이미 원고지 1만 장 분량의 초고를 탈고해 놓았다. 이번에 발간된 ‘압록강을 넘어서’는 이 지난한 작업의 첫 성과물로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실천적 삶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한 실제 인물들을 등장시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공적을 이루고도 안타깝게도 감추어져 있는 인물들을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려는 것도 이 소설의 중요한 의도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특히 소설 ‘압록강을 넘어서’에서는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간도의 독립군 투쟁인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과를 남겼음을 사료를 기초로 세세하게 다룬 장면들이 압권이었다.

외세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제국주의의 정예군과 맞붙어 두 번씩이나 대첩을 이루어낸 역사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홍범도는 간도국민회 산하 대한독립군 700명을 지휘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켜 버렸다.

세계 식민지 항쟁사상 전무후무한 성과를 낸 독립전쟁

무장 독립군들의 활약이 국경을 넘어 국내에까지 미치게 되자 일본군은 대대적인 추격 군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당시 봉오동에서는 독립군 북로군독부 연합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소설 내용을 보자.

“봉오동 골짜기는 계곡이 가팔랐다. 홍범도는 일단 봉오동 주민을 대피시킨 다음 일본군 선발대대가 깊숙이 들어오도록 유인했다. 홍범도의 부대는 죽은 듯이 매복한 채 일본군을 기다렸다. 얼마 되지 않아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 입구에서 선발대대와 합세하여 들어왔다. 그들은 입구에서 대오를 정비한 후 봉오동 골짜기로 들어섰다. 홍범도는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사나운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은 3시간 동안 저항하다가 퇴각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157명, 부상자는 300명이 발생했지만 독립군은 전사 4명, 중상 2명에 불과했다.

봉오동 참패에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관동군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특공대 10명은 훈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서 얻은 정보로 일본군의 토벌 작전을 상당 부분 파악해 놓고 있었다. 일본은 영사관에서 30명의 사망자가 난 것을 중국군의 소행으로 몰아 붙였다. 이것은 군대를 중국 영내에 진입시켜 한국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술책이었다.

일본군은 만주에서 자유로운 무장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국내군을 북상시키고 시베리아군을 남하시켜 북로군정서 토벌에 나섰다. 그리하여 5만이 넘는 대 병력에 항공대까지 포함시켜 북로군정서를 사방에서 압박하며 들어오고 있었다.

장백산맥의 말미에 있는 길림성의 수림은 울창한 원시림이었다. 김좌진의 독립군은 1차세계대전의 정세 변화로 귀국하는 체코 군대와 협상을 벌여 그들의 무기를 사들였다. 체코군으로부터 은밀히 무기를 인수받은 곳이 길림성의 원시림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압제를 받고 있던 체코군은 한국 독립군에게 동병상련의 정을 표시해 주었다. 그들은 한국군에게 소포 수류탄 중기관총 외에도 많은 양의 탄약을 제공했다. 이 체코의 실탄 80만 발이 청산리 전투에서 모두 소모되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게 한국 독립군의 토벌을 요구했다. 중국군 여단장 멍프이더오는 할 수 없이 한국 독립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진공했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사람을 보내 한국 독립군에게 길림성을 떠나는 것이 유리하다고 알려 주었다. 우군이라고 여겼던 중국군에게도 배척을 당하게 되자 한국 독립군 1,200명과 예비군 1,000명은 장백산 깊은 곳에 들어가 실력을 더 기르기로 했다. 그런 다음 낭림산맥을 넘어 아예 국내로 진공하여 전원이 참혹하게 죽자고 맹세했다. 그들은 죽음으로 치욕을 씻음으로써 국내 동포들을 깨어나게 하자는 최후의 소망을 품었던 것이었다. 그들이 장백산 청산리 방향으로 행군하기 시작했을 때, 대규모의 일본군도 청산리를 향해 출발하고 있었다. 기병과 보병이 어우러진 북로군정서는 180량의 우마차를 거느리고 있었다.

9월 초순 북극의 초가을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조국의 늦가을과 흡사했다. 뺨을 스치는 만주의 가을바람은 웬 일인지 마치 새털처럼 온화했다. 행군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계곡으로 은은히 돌아왔고 행군 대열이 내는 흙먼지는 뽀얗고 기다란 띠를 만들고 있었다. 산을 넘으면 산이고 고개를 넘으면 또 고개였다.

마침내 그들은 청산리 어구에 들어섰다. 청산리 외곽으로 두 갈래의 큰 길이 있었다. 한 갈래는 중국인 마을로 통했고 다른 한 갈래는 두만강으로 통해 조국 땅 함경북도 무산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청산리는 가파른 산 속에 있는 계곡 분지였다. 서북으로는 수림이 적었지만 동남으로는 수목이 빼곡했다. 그곳의 숲은 20미터가 넘는 소나무 잣나무 떡갈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숲으로 들어가면 대낮에도 어두워 앞으로 가기가 힘들었다. 숲의 바닥에는 이불보다 두꺼운 낙엽이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 청산리에는 곳곳마다 크고 작은 골짜기가 많았다. 유격전으로는 실로 최적의 지형이었다.

골짜기의 높은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볼 수 있었다. 10리 너머쯤 광야에서 수천 마리의 구렁이가 준동하고 있는 것 같은 일본군의 행렬을 본 것이었다. 일본군 제 37여단에 기병부대와 야포부대가 합세한 대규모 병력이었다. 일본군 육군 소장이 지휘하는 정예부대였다.

광복군은 유리한 지형지물을 찾아 신속히 이동을 시작했다. 전위대에게 북쪽 고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벌겋게 물들어 있는 황혼이 피의 전쟁을 예고하고 있는 듯했다. 어림잡아 일본군은 족히 1만 명은 될 것 같았다. 아직 지형을 익히지 않은 그들은 공격을 늦추고 있었다. 광복군은 깊은 골짜기라면 모두 찾아 들어가 은폐했다.”

“김좌진은 예비군을 이끌고 전장에서 멀리 가기로 했다. 불필요한 희생자를 줄이겠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들은 말이 예비군이지 실제로는 절반 이상이 비전투원이었다.

마을에서 한국 독립군이 무기력하다는 말을 들었는지 일본군은 기병부대를 앞세우고 대담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운평 1차 전투에서 2,200명의 전사자를 냈다. 광복군 피해는 부상자 포함 20명이었다. 큰 타격을 받은 일본군은 전열을 가다듬으며 장기전에 돌입했다. 광복군은 주력부대가 백운평 골짜기에 남은 것처럼 위장하고 밤새 120리를 이동하여 일본군의 포위망을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갑산촌에 진지를 구축한 광복군은 한국인 촌락 천수평에 와 있는 일본군 제120 기병중대를 기습하여 4명의 도망병을 제외한 중대장 이하 전원을 사살했다. 그들은 상부로 가는 일본군의 정보 문서를 읽어 19사단 2만의 주력부대가 어랑촌에 있음을 알아냈다. 그들은 전원 옥쇄의 각오로 어랑촌을 향했다.

광복군은 어랑촌 전방의 마록구 고지를 점령하여 지리적 이점을 확보한 후, 김좌진의 지휘를 받으며 2주야에 걸친 혈전을 치른 끝에 9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일본군 950명을 추가 사살했다.

2200명의 병력이 5만의 제국주의 정예군과 맞서 3300명을 사살한 청산리 3차전 전투는 세계 식민지 항쟁사상 전무후무한 성과를 낸 독립전쟁이었다.”

굴종과 패퇴의 ‘뉴라이트 역사관’에 기초한 새누리당과 박근혜 
 
소설을 읽다가 새삼 생각난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을 앞세운 ‘뉴라이트’의 허구와 그것을 근거로 받아들이고 있는 새누리당의 실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본질은 무엇인가? 일본의 식민지근대화 정책 덕분에 한국이 오늘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는 일본군국주의 역사관을 그대로 이식(利殖)한 역사관이 그 본질이며 이 허구에는 일본군 육군사관학교출신이자 군사반란으로 18년간 대통령 자리를 차고앉았던 박정희 경제신화의 허구가 자동타동(自動他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역사에서 올바른 역사관이 실종된 기이한 현상의 출발은 지난 100년 한국 근현대 역사에서 계속적인 역사왜곡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는 세력들이 현실세력으로 준동하고 있는 것에 까닭이 있으며 이승만에서 박정희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오늘 날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과 4.19혁명, 5.18광주민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이런 헌법정신마저 전면 부정하며 박정희 5.16 군사반란을 중심에 놓는 현실정치세력의 전면인 것이 박정희 딸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까지 나선 현실이다. 내용 차이는 있지만 지금 새누리당이나 야당인 민주당이 갑자기 떠드는 ‘경제민주화’도 상해 임시정부의 ‘삼균주의 건국강령’ 속에 이미 내용은 다 들어있었다.      

12월 19일 대선에서 미몽(迷夢)의 역사관은 반드시 퇴출시켜야

박정희의 무단독재의 통치행태는 박정희 사망이후 33년이 흘렀지만 수많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아직까지도 하늘에서 사무치도록 크나큰 원한인 철천지원(徹天之寃)으로 남아있다. ‘인혁당간첩’으로 둔갑시켜 사법살인을 당한 당사자들과 그 유가족들의 한(恨)이 바로 그것이고 이외에도 무수한 생명들이 구겨지고 스러져 안타까운 처지로 내몰렸다. 이런 반역사의 현실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역사의 과오에 대한 깔끔한 청산이 전무(全無)했고 박정희 등 일제 앞잡이들이 해방이후 도리어 호령하고 힘을 행사하는 착란현실에서 비롯됐음은 이제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민’은 항상 백전백패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역사퇴행이 마치 역사의 전부인양 호도되기도 했다. 지독한 열패감의 사대주의 식민사관이 지배적인 역사관이 되면서 역사 착시현상이 버젓한 현실이 된 것이다.

이제 오는 12월 19일 대선에서 이런 식민지 역사관은 반드시 퇴출시켜야 한다. 역사를 모르고 역사의 진실과 깨달음을 모르는 정권이 계속 이어진다는 현실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

역사에서 구체적인 인간사의 사리(事理)를 거슬리며 근본을 왜곡하면 폐단이 백출하기 마련이고 언젠가는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고 간(肝)과 뇌(腦)가 땅에 뒹군다는 진리가 박정희 죽음이었다.

비정상적 권력의 운영이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고 권력 스스로 망가져 내부로부터 급속하게 내려앉는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박정희 정권의 종말이었다.

이처럼 ‘경제발전’이라는 명제에 기대어 불안한 지지층을 넓히고자 책동하면서 온갖 졸렬한 수법들을 동원하면서 민의를 또 왜곡하고 시민을 압살하고자 시도하는 무리들의 준동이란 기실 역사의 도도한 물살에는 그저 한 줌이다.

김갑수의 소설  ‘압록강을 넘어서’를 읽다보면 역사는 모욕이나 능욕(凌辱)의 대상일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일깨운다.

당연히 소설가 김갑수는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 있어서 사서(史書)가 1차로 중요한 자료였으며 중국과 일본 저자들의 책을 포함, 좌우익의 근·현대사 역사서들이 독서대상이었다고 했다. 또한 당대에 산 인물들의 자서전과 회고록 그리고 논문들도 요긴한 도움이 됐으며  신문, 잡지도 찾아 읽었다고 했다. 대략 200여 권 정도의 저작물을 읽지 않았나 했다.

“꽃잎에 흙먼지가 이는 날이었다. 산과 강의 살구꽃 진달래들이 물결처럼 흔들거리고 있었다. 흰나비 노랑나비들이 흙바람에 쏠렸고 제비들이 낮은 허공을 화살같이 비행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위에서 아지랑이가 사그라지고 구름 그림자가 호수의 수면을 부유하고 있었다. 알 까는 뻐꾸기 소리가 유달리 처절한 반면 부엉이는 눈만 꿈벅이며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신규식의 준마는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다.”

“압록강(鴨綠江) 물빛이 오리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물길 이천 리 압록은 조선에서 가장 긴 강이었다. 또한 압록은 조선에서 가장 넓은 강이기도 했다. 한반도 면적의 6분의 1이 물로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압록은 그렇게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물이 없으면 야박해지고 물이 넘치면 급박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물이 많으면 사람은 온후해지는 법이다. 어찌 보면 강퍅해 보이기도 하는 신규식의 얼굴에는 이례적으로 관용의 품격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말고삐를 늦추고 섬과 섬들을 다소곳이 어루만지며 흐르고 있는 대하에 넋을 주고 있었다.

뾰족뾰족한 냉대림들이 강 유역에 펼쳐져 있었다. 전나무 삼나무 가문비나무 등으로 강 너머는 끝없는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었다. 멀리 위화도가 눈에 들어왔다. 위화도는 압록강의 물살이 옮겨 만든 흙으로 조성된 작은 섬이었다. 위화도를 본 신규식은 새로운 감회에 젖어 들었다. 저 주먹만 한 섬에서 조선왕조 500년을 다지는 역성혁명이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혁명의 씨앗은 누구도 예상 못한 곳에서 발아되는 것이었다. 신규식은 정부 수립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다지고 있었다.” (p.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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