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일본 소니는 세상을 놀라게 한 혁신적인 신제품을 발표했다. 바로 걸어 다니며 들을 수 있는 손 안의 카세트 재생기 ‘워크맨’이었다. 그동안 거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육중한 오디오 세트, 음악을 들으면서 다닌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커다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만 재생 가능하던 음악 테이프를 허리춤에 찰 수도 있고, 손가방에 넣을 수도 있는 작은 기기를 통해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었다. 전 세계가 열광했고, 이 같은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는 소니 제품이 아니더라도 모두 ‘워크맨’이라고 통칭됐다. 복사기를 제록스, (우리나라에서) 상자 속에 든 티슈를 크리넥스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삼성이 만든 내수용 ‘워크맨 짝퉁’ 마이마이

1981년, 삼성전자는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재생기 ‘마이마이’를 출시한다. 외관은 소니 워크맨과 너무나 닮았다. 심지어 광고사진에 쓰인 헤드폰 모양까지(붉은색 원 안)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당시 삼성전자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회사였다. 지난해 연 매출이 160조를 넘었지만, 1981년 매출액은 겨우 3,700억 원이었다. 당시 매출액 순위 1위였던 대우(1조 8980억 원) 등 종합상사와 비교할 수 없음은 물론, 제조업 중에서도 현대중공업, 금성사에 이어 3위였다.

당시 소니가 마이마이라는 ‘짝퉁’의 출현에 적극 대응하지 않은 것은, 이처럼 삼성전자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짝퉁을 내놓더라도 사실상 한국 내수용에 불과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기사들을 보면 삼성전자는 1982년 처음으로 수출 1억 불을 돌파했으며(매일경제 1982년 5월 8일 기사), 수출 제품도 전자레인지,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이었다. 지금 아이폰과 갤럭시 짝퉁이 중국에서 판을 치고 있지만, 어차피 짝퉁을 수출할 수는 없으므로 적극 대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쩌면 소니가 ‘디자인’이라는 데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소니 워크맨 디자인은 기능적으로도 우수하고 심미적 측면에서도 미려했지만,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바뀌어 일관된 컨셉트가 계속 유지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참조: 워크맨 디자인 변천사)

아니면 소니가 소비자들을 위해 ‘베끼기’ 제품을 용인해주는 ‘대인배’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적재산권 개념이 최근처럼 강하게 강조되던 시기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기술 특허도 아닌 디자인에 대해 지적재산권을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소니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애플: 룩앤필 소송(애플 vs MS)

하지만 2007년에 ‘아이폰’이라는 혁신적인 스마트폰을 내놓은 애플은 소니 같은 대인배가 아니었다. 아니, 태생부터 거의 병적일 정도로 지적재산권, 특히 디자인에 대한 지적재산에 대해 집착하는 기업이었다.

1987년, 이전까지 텍스트로 표시되고 키보드로 입력하는 MS-DOS라는 운영체제를 IBM (호환) PC에 탑재해 시장을 장악해 왔던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래픽 기반 운영체제인 윈도 2.0을 내놓는다. 물론 1985년 윈도 1.0이 나오긴 했지만, 수준도 떨어지고 거의 사용되지도 않았다. 윈도 2.0을 본 애플은 경악하고 매킨토시의 그래픽 기반 UI를 베꼈다며 소송을 제기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룩앤필 소송(Look and Feel lawsuit)’이다.

이 소송은 이번 애플-삼성 소송만큼이나 큰 관심을 끌었다. 소송가액은 10억 달러. 당시 돈 가치를 생각하면 굉장하다. 이 뉴스를 보도한 신문이 지금도 이베이에서 거래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소송에서 애플은 졌다. MS의 베끼기는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폴더’ 대신 ‘프로그램 그룹’이 있었고, 프로그램 그룹 안에 또 다른 프로그램 그룹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룩앤필 평결은 iOS와 안드로이드의 시비꺼리와 뭔가 매우 유사하지 않은가?? 근데 한가지 지적할 점 그리고 좀 다른점 . MS는 후발주자로서 맥OS의 윈도를 배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 윈도3.1까지 맥OS에 있던 ‘폴더’는 없었고 ‘프로그램 그룹’이 있었고, 그 속에 프로그램 그룹을 더 만들순 없었다. 모양도 지금 윈도의 ‘폴더’모양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의 ‘탐색기’(애플에서는 파인더)도 ‘프로그램 매니저 PM’이었었다. 물론 ‘프로그램 그룹’ ‘매니저’는 매우 조악하게 억지로 만든 모양새였다. 쓰기에도 불편했고."

(필자 주: ‘룩앤필’ 소송 부분은 인지과학을 공부하고 현재 e러닝을 연구하고 있는 페북 지인 이수화 솔루터스 스마트러닝 연구소장님의 페북 글 중 허락을 받고 인용했습니다. 원글이 ‘친구의 친구’ 공개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MS는 소송에서 승리를 거둔 후 윈도95부터 대담하게 ‘폴더’를 넣었고 ‘폴더 안에 폴더’도 만들 수 있게 했다.

삼성의 과감한 선택, ‘똑같이 베끼기’

하지만 삼성은 달랐다. 그냥 똑같이 베꼈다.

겉모양도 베꼈고, 아이콘 모양이나 배열도 베꼈고, 심지어 패키지의 겉모양과 구성까지 베꼈다.
소니 워크맨 베끼던 시절부터 했던 짓을 ‘룩앤필 소송 때부터 베끼기에 알레르기가 있는’ 애플 아이폰에 대고 똑같이 한 것이다.

갤럭시S가 아이폰3GS를 얼마나 똑같이 베꼈는지는 이미 유명한 블로그 글(konatamoe.com)에 잘 정리돼 있으니 굳이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실 나는 2010년 아이폰 3GS를 샀고, 거의 동시에 남편이 갤럭시S를 샀기 때문에 둘이 얼마나 비슷한지 잘 알고 있다. 한마디로 갤럭시S는 꺼 놓으면 아이폰인 줄 알 정도로 똑같다. 오로지 홈 버튼 모양이 동그라미냐 네모냐 차이다. 팟캐스트 ‘시사난타H’를 같이 진행하는 김지은 기자의 휴대폰이 갤럭시S인데, 김 기자에 따르면 “얼핏 본 사람들이 아이폰이냐고 물어보지 갤럭시냐고 물어보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전도된 애국주의가 만들어 낸 ‘눈뜬 장님’

신기한 것은 아직도 삼성-애플 소송 관련 블로그 글이나 트윗에는 “내가 보기엔 안 닮았다”는 댓글이 엄청나게 올라온다는 점인데, 아이폰3GS와 갤럭시S가 전혀 안 닮았다는 분은 “중국의 QQ 자동차가 마티즈를 베끼지 않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애플이 ‘둥그런 모서리’ 때문에 소송을 걸었으니 이제 핸드폰 모서리를 다 세모나게 만들어야 하냐” 하는 등의 황당한 기사는 이 같은 ‘눈뜬 장님’들한테 좋은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사는 이번 소송의 배심원 평결문과 특허 원문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것이다. (참조: www.wired.com)

이것이 이번에 “둥근 모서리 특허”라 불렸던 D087번 디자인 특허이다. 외신에 ‘둥근 모서리와 아랫부분 홈버튼’이라고 나와 있으니 마치 둥근 모서리라는 것을 특허로 등록한 것처럼 보이지만, 상식적으로 애초에 미국 특허청이 바보가 아닌 이상 ‘둥근 모서리’라는 것을 특허로 받아줄 리가 없다. 디자인 특허란 말 그대로 제품의 디자인을 등록해 놓는 것으로 의장등록과 비슷한 개념이다. 테두리 디자인을 그려서 등록해 놓은 것이므로, 이 디자인과 거의 똑같아야 침해가 인정된다.그래서 배심원들은 이 디자인 특허를 침해한 제품은 ‘갤럭시S’뿐이라고 평결했다. (참조: 배심원 평결문)

평결문 6페이지를 보면 배심원들은 D087 특허를 침해한 것이 갤럭시S와 형제들뿐이라고 평결하고 있다. (알다시피 바이브런트 역시 갤럭시S다) 즉 갤럭시S는 둥근 모서리를 채택해서가 아니라 아이폰3GS를 똑같이 베껴서 특허를 침해했다는 평결을 받게 된 것이다. 애플은 이 점을 지적했고, 삼성은 수세적인 입장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있는 일부 눈뜬 장님들을 제외하면 일반인들의 눈에는 두 제품이 거의 비슷하게 보이니까.

여기에 삼성의 내부 이메일과 구글의 “너무 비슷하니 좀 고쳐라”는 취지의 경고, 이른바 ‘벤치마킹’이라는 명목으로 아이폰의 모든 기능을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지적한 내부 문서 등은 배심원들에게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베꼈다’는 결론을 내리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같은 달 삼성전자 직원들이 주고받은 이메일인 42번과 43번 증거는 구글의 시각까지 포함된다. 해당 증거에는 구글이 삼성전자에게 ‘애플과 너무 비슷하니 앞면부터 눈에 띄게 다르게 해달라’ 라는 내용이 들어있다. 또한 43번에는 'S 시리즈의 디자인 유사건은 CMF(색상, 소재, 마감) 등으로 대응토록 하고…'라는 문구와 '구글은 P3에서 아이패드 대비 디자인 차별화를 요구 중'이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이는 구글과 삼성전자 모두 애플의 제품과 디자인 유사성을 미리 인식하고 고의적으로 모방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향후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 루시 고 판사의 최종 판결에서 징벌적 배상금이 추가된다면 바로 이 지점이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애플-삼성 미공개 재판기록 보니..  (ZD넷코리아, 2012년 8월 29일)

많은 언론들이 다른 나라와 미국의 판결을 비교하며 애국주의라고 모는데,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적재산권을 특수하게 많이 보호하는 나라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특허도 20년이나 보호하는 것은 물론, 의장등록에 대해서도 디자인 특허와 상표권상 트레이드 드레스 제도를 동시에 갖고 있다. 코카콜라 병 실루엣의 경우, 디자인 특허는 만료됐지만, 아직도 트레이드 드레스를 적용받고 있다. 이런 미국의 판례는 피고소인인 삼성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고려했어야 하는 변수였다. 하지만 표준 특허를 가지고 맞고소하는 정도로, 상당히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이번 평결을 무조건 “배심원의 애국심 때문”이라고 모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보도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의 베끼기 전략은 합리적이었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왜 삼성은 이렇게 똑같이 베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소니 워크맨 베끼던 시절의 ‘습관’을 그대로 반복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삼성은 연 매출 3700억 원의 내수 기업이 아니다. 165조 원의 매출을 올리고 그중 상당 부분을 해외에서 올리는 ‘글로벌 기업’이다. 그런데 왜 ‘대놓고 베끼기’를 감행했을까?

증권사 애널리스트 등 몇몇 사람들은 삼성이 오랜 ‘베끼기’를 통해 “어설프게 베끼는 것보다는 똑같이 베끼는 게 더 승산 있다”는 점을 체득하고, ‘그래 소송 걸 테면 걸어라’ 하면서 의도적으로 베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이런 의심이 가능한 것은 실제로 삼성이 갤럭시S 이후 거둔 눈부신 성공과, 애플한테 각종 소송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베끼기’ 신공을 꾸준히 발휘하고 있기(참조 사이트) 때문이다.

사실 갤럭시S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한 달 정도 후) 나온 팬택의 베가 시리즈의 경우, 아이폰을 흉내 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여러 가지로 다르게 해 보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일단 홈버튼 역할을 하는 물리적 버튼의 디자인이나 위치가 크게 다르고, 아이콘 테두리 모양도 다르다. 룩앤필 소송에서 MS가 폴더까지 베끼지는 않았던 것으로 인정된 것처럼. (LG전자는 갤럭시S가 나온 후에도 제대로 된 스마트폰이 나올 때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으니 논외로 하자) 모토로라, HTC 등의 제품도 모두 안드로이드를 썼지만, 제품 디자인이나 UI가 크게 달랐다.

하지만 그 많은 안드로이드 제품을 다 누르고 갤럭시가 승자가 됐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는 삼성이 갤럭시S에 어마어마한 마케팅비용을 퍼부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당시 안드로이드 폰 중 가장 쓰기 편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 어설프게 베끼면 전체적인 조화에서 아무래도 부족한 면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아예 똑같이 베끼면 몇 년 동안 치열한 연구개발의 성과를 그대로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삼성은 오랜 ‘표절의 역사’를 통해 체득한 것이 아닐까.

훌륭한 디자이너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제품 디자인에서 매우 뛰어났던 LG의 경우 한참 동안 제대로 된 스마트폰 디자인을 내놓지 못하고 삽질을 거듭했는데(4대 3 비율 폰을 내놓지 않나), 이는 디자이너들의 자존심 상 똑같이 베끼는 짓은 하기 싫었기 때문일 수 있다. 프라다폰이 매우 새롭고 놀라운 디자인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아이폰에 영감을 주었을 수도 있다) 아이폰처럼 사용자가 사용하기 편리하다고는 쉽게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폰의 디자인은 단순히 예쁘다를 떠나서 ‘아기도 만지면 바로 사용 가능할 정도’로 유저인터페이스가 편리하다는 점, 즉 심미성과 기능성이 극적으로 만났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강점을 보였는데, 이러한 완성도는 어느 한구석만 달라지더라도 깨질 수 있어서 ‘완전히 베낀’ 갤럭시S가 가장 나을 수밖에 없었다.

페이스북 지인인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삼성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베끼기를 통해 얻은 성과를 감안하면 삼성 입장에서는 조족지혈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은 갤럭시 시리즈로 스마트폰 시장, 아니 전 세계 휴대폰 시장을 평정했고, 올해 상반기에만 무려 12조 원이 넘는 순익을 냈다. 이 순익의 상당 부분이 휴대폰 사업부에서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겨우 1조 원 정도의 손해는 손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다.

주체적 소비자의 합리적 관점이 필요

사실 나는 미국에서 지적재산권을 지나칠 정도로 보호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다. 과도한 특허나 지적재산권 보호가 인류의 지적 발전을 저해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터넷 주인찾기 컨퍼런스, ‘저작권은 창작의 무덤’에서 ‘나는 범죄자가 아닙니다’라는 발제를 한 적도 있다.(내용은 현행 저작권 체계의 문제를 비판한 것이다) 이번 소송도 결국 소비자들이 제품을 사면서 낸 돈으로 변호사들만 먹여 살리는 짓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안만을 놓고 판단하거나 보도할 때는 감정이 아닌 객관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 기사는 슬로우뉴스에 동시 게재됩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