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지난 1일 평범한 시민의 사진을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범 고아무개씨로 착각해 희대의 오보를 냈다. 흉악범의 신상공개를 당연시했던 언론 관행이 빚은 참사라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언론은 조선의 오보와 상관없이 고아무개씨의 얼굴과 행적, 발언 등을 상세히 전하며 ‘신상털기’식 보도를 경쟁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언론사들은 알 권리와 국민 정서, 범죄 예방 등을 이유로 범죄자 신상공개를 합리화하고 있다. 하지만 언론사의 흉악범 신상공개가 아무런 법적근거가 없는 자의적 판단으로서 범죄 억지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피의자의 인격권을 상당히 침해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는 언론이 국민의 정서를 등에 업고 법률 위에 서고 있다는 뜻이다.

김종천 변호사(법무법인 태웅, 언론인권센터 언론피해구조본부장)는 5일 언론인권센터가 주최한 토론회 자리에서 “한국 언론이 흉악범죄보도에 대해서는 법치라는 가치를 망각한다”고 꼬집으며 “언론은 흉악범죄자 초상을 공개할 법적 근거가 없다. 검찰이나 경찰이 신상정보를 공개할 순 있지만 이것이 언론사의 초상권 공개 근거가 되진 못한다”고 못 박았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국민의 알 권리’도 범죄자 신상공개를 정당화할 순 없다. 김 변호사는 “알 권리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으로, 기본권은 국가에 대한 방어권의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알 권리를 주장하려면 그 상대가 국가와 같은 공권력이 돼야 한다”고 지적한 뒤 “범죄자와 같은 사인(私人)에게는 국민들이 알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고 밝혔다.

즉 범죄자는 알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상대가 될 수 없다. 만약 국민들의 호기심 충족이 알 권리라면 선정적 이슈에 대해서도 모두 알권리가 적용돼야 한다. 또 현재 언론의 신상공개 근거 논리대로라면 고(故) 장자연 리스트에 접대대상으로 나와 있는 주요 일간지 유력 인사 역시 알 권리에 의해 공개할 수밖에 없다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그는 이어 초상 공개가 범죄예방에 거의 도움이 안 된다는 점도 지적했다. “범죄자가 장기 복역 이후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기억할 것을 걱정해 출소 후 범죄 충동을 억제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지적한 뒤 “마찬가지로 일반인 역시 초상 공개가 겁이 나 흉악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 볼 근거도 희박하다”고 강조했다.

더욱이 범죄자는 흔히 통용되는 ‘공인’이 아니라는 게 김 변호사 설명이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관심인물이 된다고 해서 공적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며,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고 공적 인물로 판단해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대법원 역시 1998년 “범죄혐의자 보도가 반드시 범죄보도와 같은 공공성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김 변호사는 또 “현재 언론의 신상정보 공개가 중세 유럽의 명예형과 같은 실질적 형벌로 기능하고 있지만 우리나라 형법에 이 같은 형벌에 대해 정해놓은 것이 없어서 죄형법정주의에 위반한다는 지적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짐승 같은 자들의 권리를 보호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 김 변호사는 “정서적인 것에 편승해 법률에 규정되지 않은 제재를 가해선 안 된다”며 “더욱이 유죄판결로 가해질 처벌 이외의 사형(私刑)을 언론이 가하는 것을 허용할 근거는 없다. 흉악범 얼굴공개는 사적 보복의 감정과 호기심 충족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 헌법재판소는 2003년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신상정보 공개를 규정한 아동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의 위헌법률심판사건에서 “대상자를 범죄퇴치수단으로 취급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하고 범죄억지효과가 미비하거나 불확실한데 비해 인격권 침해가 커 위헌이란 의견이 다수였으나 위헌 정족수를 넘지 못해 위헌 결정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날 토론회에선 흉악범죄자보도에 경쟁적으로 나서는 언론이 반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양현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은 “아동성폭력 관련 기사가 2008년 김길태 사건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 현재 김길태로만 693건의 기사가 검색된다”고 지적한 뒤 “이제는 성폭행하려는 장면까지 뉴스에 나오는 수준이다. 꼭 필요한 국민의 알권리는 무시되고 무차별식 보도로 언론이 광범위한 공포심만 생산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언론은 지난 2009년 강호순 사건을 계기로 흉악범죄자의 신상공개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기자들의 내부성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력 일간지의 한 사회부 기자는 “이제 경찰국가냐 복지국가냐의 선택인데 한국은 경찰국가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 언젠가는 모두가 후회하는 날이 올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이 기자는 “현재 보도행태가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위한 것인지 의문이다. 언론사별 무분별한 특종경쟁이 문제다”라고 지적한 뒤 “언론이 성범죄의 사회구조적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전자발찌와 불심건문 같은 방안을 내세우는 것은 근본적 해결과도 거리가 먼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박록삼 한국기자협회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서울신문 기자)은 “KBS 박대기 기자의 눈사람 리포트 이후 최근 태풍 보도에서 기자가 밧줄에 몸을 묶고 나오는 등 보도 전반이 선정적으로 흘러왔다”고 지적했다. 박록삼 위원은 “선정보도는 언론사간 상업적 경쟁이 심해지며 반복되고 있어 기자협회 내 윤리위원회가 유명무실할 정도다. 기자들 스스로 자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며 답답한 상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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