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만에 고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에서 6cm 크기의 둥근 골절 흔적이 발견돼 타살의혹이 증폭된 것과 관련해 법의학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사고 전 이미 의식을 잃었을 것이라고 진단해 제3의 인물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특히 미국 법의학전문가는 독극물 주입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해 사건 당시 장 선생을 부검했던 검안의가 장 선생의 어깨와 엉덩이에 주사 자욱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1993년)한 사실이 새삼 주목을 받았다.

특히 장씨 곁에서 그의 추락을 지켜봤다는 김용환씨가 증언을 번복한 사실도 의혹으로 제기됐을 뿐 아니라 장 선생이 떨어졌다는 벼랑을 한달음에 달려내려왔다는 증언에 대해 해당 등산로를 직접 등정해본 산악전문가들은 “장비없이 내려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김씨 증언 자체의 신뢰성이 의문으로 제기된 것이다.

SBS는 지난 1일 밤 방송된 <그것이 알고싶다> '유골은 무엇을 말하는가-장준하 그 죽음의 미스터리' 편에서 37년 만에 드러난 장 선생 유골의 골절 상태를 근거로 법의학자의 분석과 함께 사건 당일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제작진은 국내 법의학과 88명의 자문을 요청해 이 가운데 공식적으로 답변한 전문가 29명의 분석을 근거로 장 선생의 사인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14m 높이에서 추락했는데 206개로 이뤄진 우리 몸 뼈가운데 두개골 엉덩이뼈 만 부러진 것은 법의학적으로 자연스럽지 않다고 지적했다고 방송했다. 오른쪽 두개골 함몰골절도 추락한 시신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상처라는 것. 추락했을 때도 나타날 수 있는 상처라는 분석도 있었다고 제작진은 전했다.

제작진은 누군가 장 선생을 가격했다는 것을 전제로 할 경우 1970년 대 돌 쌓는 사람들이 쓰는 단면이 6cm 크기의 헤머였을 가능성을 찾아냈다.

이에 반해 두개골 외에 골반뼈가 부서진 것은 가격한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떨어지는 사람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팔이나 다리를 딛으려 하는데 두개골과 골반의 골절 외엔 시신이 깨끗한 장 선생의 시신의 상태를 볼 때 설명이 안된다는 것이 법의학자들의 분석이었다. 사고 직전 이미 의식을 잃지 않았다면 이렇게 정확하고 깨끗한 골절만 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격당했을 것이라는 전문가들과 추락했을 것이라는 전문가 모두 장 선생이 사고 직전 이미 의식을 잃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윤일규 순천향대 교수는 “그 상황은 결국 본인의 의식을 잃게 할 수 있는 외부의 요인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추론했다.

에릭 바틀링크 교수(캘리포니아 주립대 법의인류학과)는 “추락할 때 이 사람이 의식이 없거나 죽었거나 독극물에 중독됐다면 수평으로 추락했을 것”이라며 독극물 같은 외부요인을 검토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장준하 선생의 시신에 주사바늘 상처가 있었다는 것도 주목을 받았다. 장 선생의 사체를 검안한 법의학자 고 조철구 박사는 1993년 SBS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왼쪽 팔에 주사자리가 있었어요 그것도 사진을 쫌 찍어달라 이러고. 그 다음에 뒤를 보니까 바른쪽 엉덩이엔가 주사 자리가 있어서 그것도 찍어달라 이랬고”라고 증언했다.

장 선생의 아내 김희숙씨는 병원에 간 일도 전혀 없었다고 말해 병원의 주사자욱은 아님을 시사했다.

제작진은 “가격에 의한 것이든 추락에 의한 것이든 장 선생은 이미 사고 이전에 의식을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문의 주사자욱도 발견됐다”면서도 “섣부른 추리는 하지 않으려 한다. 당시 부검이 이뤄지지 않아 이 주사바늘의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적할 단서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선을 그었다.

또한 제작진은 장 선생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김용환씨의 증언도 미스터리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사건 전날 장 선생의 산악회를 방문해 다음날 장 선생이 약사봉 등산을 한다는 소식을 확인한 뒤 산행에 동참한 김씨는 1975년 8월 17일 낮 12시경 약사봉 계곡 입구에 도착해 일행이 짐을 푼 사이 ‘주위를 둘러보고 오겠다’는 장 선생의 뒤를 따랐다.

김씨는 장 선생과 함께 올라가다 10분 쯤 되니 군인 2명이 있었고, 40분쯤 됐을 땐 약사봉 정상을 조금 넘어선 곳에서 장 선생이 만들어온 샌드위치를 함께 나눠먹고서 오후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사고가 났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특히 장 선생이 자신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사코 가파른 벼랑을 통해 하산을 시도하다가 소나무 가지를 잡고 건너려다 실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장 선생 검안의 고 조철구 박사는 1993년 제작진과 인터뷰에서 “사실 장 선생의 양쪽 손을 보니까 똑같이 주먹을 쥐고 있어서 억지로 주먹을 펴서 봤더니 이 손 안에는 아무 상처가 없이 깨끗해”라고 말했다. 이후 김용환씨는 진술을 바꿨다. 김씨는 1998년 포천경찰서의 재조사에서 “장준하씨가 추락할 때 소나무를 잡았는지 안 잡았는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 조사 땐 “휜 소나무가 있다는 말을 지금까지 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1975년 장 선생 사망 당일 직후 녹음된 육성에서는 “나무 윗부분을 잡으셔가지고 어떻게 잘못 뛰셨는지 기억이 안나고 제가 여기서 봤을 때 나무가 휘는 것은 봤어요”라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둘 중 무엇 하나는 거짓말인 것이다.

또한 김씨는 사고 직후 경찰에 신고하러 간다면서 8시간 동안 자리를 떠난 것 역시 거짓이라는 반박을 받아왔다. 제작진은 이아무개 당시 포천이동지서 경찰관의 2004년 의문사위 진술을 인용해 “김용환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목격자가 있었다면 당연히 실황조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그와 같은 업무를 한 적이 없고 목격자라는 이가 그 시각에 이동지서에 들른 사실이 전혀 없다”고 전했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왔다며 김씨가 돌아온 시간은 자정무렵이었다는 점을 들어 제작진은 “사라진 8시간 동안 그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누구도 모른다”고 밝혔다.

특히 장 선생이 추락했다는 약사봉 벼랑에서 떨어진 장 선생을 구하고자 한달음에 달려내려왔다는 김씨의 주장도 도마위에 올랐다. 김씨는 1993년 장준하 사인규명조사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봤으니까... 어떤 정신으로 내려왔겠느냐”며 “선생님이 떨어지셨는데 정신없이 미끄러지면서 어떻게 내려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등산경력 20년 이상의 전문가들과 함께 장 선생이 택했다는 등산로를 따라 가 본 결과 장 선생이 내려온 하산로의 경우 도저히 일반인이 내려갈 수 없다는 것이 산악인들의 결론이었다. “장비가 없으면 전문가들도 추락”(김준규 산악인)이라는 것.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자인 김상중씨는 “밥짓고 있으라던 장 선생이 김씨와 함께 1시간 가량 따로 등정하다 샌드위치를 먹었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며 “김씨는 이 계곡으로 가는 길을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 벼랑에 온 것일까. 함께 산행을 했다는 것은 사실일까”라고 의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김씨는 제작진과 만나 “말려도 안들었다. (장 선생이) ‘내가 혼자 올라왔으니까, 빨리 내려가야 할 거 아니냐’고 했는데 내가 그걸 못막았다. 그런데도 먼저 뛰어서 넘으셨다”며 “누구에게도 난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내가 뭐 신이냐. 어떻게 해, 막지를 못한 걸 참 그것도 운명이랄까.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을 어떻게 뭐로 풀라는 거냐”고 말했다.

한편, 당시 장 선생의 강한 의혹을 제기했던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은 줄줄이 검찰에 소환돼 곤욕을 치른 사실도 드러났다.

또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는 105 보안부대장이 장 선생 사망 당일 보안사령관에게 긴급한 보안 보고를 올린 것을 확인했다. 이 보고를 받은 다음날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과 만났다. 의문사위에서는 기무사에 당시 보안사령부의 자료를 요구했지만 문은열리지 않았다.

진행자 김상중씨는 “여기까지 오는데도 우리 사회는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라도 진실을 가로막고 있는 단단한 벽을 거두고 37년 간 진 유족에 빚을 갚아야 한다”며 “그것만이 조국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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