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벼랑 끝에 매달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거기로 내몰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손과 발만으로 벼랑 꼭대기까지 한 마리 나비처럼 가뿐하게 춤추며 오르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그들을 암벽등반가(스포츠 클라이머)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클라이머 위에 또 한 사람이 매달려있다. 그는 클라이머들보다 한 발 앞서 벼랑을 기어올라 한 가닥 자일에 몸을 맡긴 채 한 손에는 버거워 보이는 긴 줌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들고 위태롭게 아래를 내려다 보며 셔터를 누른다. 강레아 (본명 강신숙. 45세). 그녀는 국내 유일의 여성 암벽등반 사진가다. 전 세계를 통 틀어서도 여성 암벽등반사진가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8월 17일부터 대학로 목금토 갤러리에서는  그녀의 세번째 사진전 <발현>이 전시중(9월 14일까지)이다. 넓은 갤러리 벽에는 세계 최고수준의 국내외 클라이머들(김자인, 박희용 등)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대형사진 2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태풍 덴빈이 흩뿌리는 비를 뚫고 찾아간 갤러리에서 강레아 씨와 한 시간 여 얘기를 나눴다. 수수한 민낯의 그녀에게서는 청명한 가을 산바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클라이머들의 얼굴만을 가득 채운 구도의 대형 흑백사진들이다. 선수들의 근육이나 몸짓의 아름다움을 배제한 작품만으로 구성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인간의 몸에서 쓸 수 있는 모든 근육을 쓰는 것이 암벽등반이다. 한 마리의 새가 나는 것처럼 클라이밍 하는 선수들의 몸은 너무 아름답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암벽등반사진이 아니라 클라이머들의 얼굴 일부만을 클로즈업 한 것은 내 의도고 욕심이다. 보도나 다큐멘터리적인 접근이 아니라 극한 상황에 다다른 선수들의 눈빛과 표정만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한계를 극복하는 ‘인간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이번 전시의 사진들은 초상사진이 아니다. 큰 사진 앞에 가까이 서서, 인간의 한계점에 다다른 선수들의 풀린 듯한, 혹은 더욱 힘있게 빛나는 눈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느끼는 심연의 세계를 함께 느껴 보기 바란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소재주의를 넘어 순수사진으로 접어드는 시도를 하고 싶었다. 


암벽등반사진을 찍는 현장의 모습은?

미국의 요세미티와 같은 자연암벽등반도 가고 인공암벽에서도 찍는다. 얼마 전 갔던 요세미티에서는 바위에 매달려 클라이머와 같은 축의 머리위에서 촬영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2~300m 높이의 암벽에 매달려 허공에서 촬영했다. 암벽을 오르는 선수의 뒷모습과 암벽의 고도감을 한꺼번에 내려다보는 위치를 잡은 거다. 그 때는 자일에 매달려 바위와의 거리가 적어도 3~5m 정도 떨어져 있어서 바람이 불면 몸이 뱅뱅 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고 돌다가 몸이 암벽을 향할 때에 맞춰 사진을 찍는다.


<발현> 작업은 대부분 인공암벽에서 찍은 것으로, 클라이밍 대회가 열리는 15m 높이의 인공암벽은 철근구조물인데 계단이 설치되어 있기도 하고, 공사장 비계처럼 철근 구조로만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좁은 계단이나 비계를 타고 올라가 최상단 완등지점에서 촬영장소를 확보하고 선수들을 기다린다. 선수가 카메라 앞 약 2m 거리에 도달하면 300mm 화각으로 상반신을 찍었다. 그 사진의 얼굴부분을 크롭한 것이 이번 <발현>전에 걸린 작품들이다. 칼라가 없어지면 표현하고자하는 대상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표현하기에 좋아 흑백으로 전환했다.


암벽등반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숫자는 매번 다르지만, 예선과 준결승을 거쳐 7~9명 정도만 결승에 진출한다. 모든 대회에서 문제(인공암벽 구조물의 난이도) 출제자는 참가선수들의 기량을 감안해, 선수들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체력을 소모하고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을 만큼의 난이도를 설정해서 겨우 한 두명의 선수만이 완등할 수 있도록 한다. 오버행 지점에서 많은 선수들은 근육에 젖산이 쌓여 의지와 상관없이 손이 풀리는 지점(크럭스)에 도달한다. 이번 <발현>전에 걸린 사진은 그 지점에 도달한 선수들을 기록한 사진이다.

사용하는 카메라 장비는?

캐논 EOS 5D Mark II (890g)에 28-300mm F1:3.5-5.6 (1,670g) 렌즈 하나만으로 작업한다. 자일에 매달려 몸을 오른쪽으로 틀어 위 상체가 거의 아래를 향한 상태로 올라오는 클라이머를 찍는다. 예전에는 16-35mm(광각줌) 와 70-200mm(망원줌) 두 개의 렌즈를 갖고 올라가 교환하며 촬영했는데 만약 렌즈를 떨어뜨리면 클라이머의 안전에 치명적이다. 최대한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클라이머와 내게 안전하다. 1m라도 몸을 움직이게 되면 자일에 스윙(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먹는다. 그러면 벽에 부딪힐 수도 있고 내 자일이 선수 위로 돌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렌즈를 교환하는 것보다 줌 렌즈가 안전하고 편하다. 하지만 무거운 줌렌즈와 바디를 합친 무게가 2.5kg이 넘어서 렌즈를 바꾸고 처음 몇 달은 오른팔 인대가 늘어나 촬영에 애를 먹었다.

암벽등반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고교 졸업후 바로 시작한 사회생활 중에 직장동료들과 산행을 시작했다. 가야산에서 만난 일출이 카메라를 들게 된 계기가 됐다. 검은색에 가까운 하늘빛이 군청에서 주황색으로 변해가는 계조의 아름다움은 너무 강렬했다. 뒤늦게 입학한 대학의 의상학과에서도 사진기술은 필요했고 시간이 지나며 좀 더 잘 찍게 됐다. 졸업 후 활황을 맞은 웨딩사진 업계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웨딩사진을 더 잘 찍어보려고 신구대학 사진과에 입학했고 그 즈음 암벽등반을 처음 접하면서 산에서 암벽 등반가이자 화가인 남편도 만났다. 2000년에 대학교 졸업 작품전을 앞두고 있을 때 수준급의 암벽 등반가였던 남편은 ‘세계의 수많은 사진 전공자들 중에 암벽 타며 사진 찍을 수 있는, 게다가 여성이라면 몇 명이나 되겠냐? 내가 도와줄게’라며 암벽등반 사진을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여 졸업 작품을 암벽사진으로 제출했다. 그렇게 산악사진에 본격적으로 입문했고 이후로 월간 <산>, <사람과 산> 등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2007년과 2010년에 두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그 기간 동안 국내 아웃도어 업계가 급성장했고 10년 넘게 국내 유일(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의 여성 암벽등반사진가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노력한 결과 자연스럽게 국내외 정상급 산악인, 암벽등반가들을 촬영하게 됐다. 내 암벽등반 수준은 5.10.c (요세미티 등급체계)급으로 수직벽을 오르 내릴 수 있는 정도다. 정상급 프로선수들은 5.14 정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촬영은?

2006년에 겨울에 촬영한 아시아 최대 규모의 토왕성폭포의 빙폭 등반이다. 2000년부터 남편과 1년에 한 번씩 꼭 오르는 곳으로 우리 둘에겐 성지와 같다. 맨 처음엔 남편과 함께 열 여섯 시간 걸려 올랐다. 2006년 1월에 우리 부부와 선수 4명과 취재기자 1명이 잡지 기사를 위해 토왕성빙폭에 갔다. ‘리딩’ 하는 사람이 개척해 놓은 루트를 따라 가는 ‘후등’을 찍은 사진은 긴장감이 없기 때문에 독자들도 매력을 못 느낄뿐더러, 그때까지만 해도 토왕성폭포에서 사진 찍힌 클라이머들이 없어서 클라이머들도 리딩하는 자신의 모습이 멋지게 찍히길 바랬다. 그래서 4명 모두에게 리딩을 하게 했고 시간은 평소의 두 배가 걸렸다. 새벽 3시에 시작했는데 다음날 새벽 5시에 촬영이 끝났다. 촬영할 때는 집중하기 때문에 추위도 못 느끼고 에너지를 얼마나 쓰는지도 모른다. 쉬지 않고 25시간의 촬영을 마치고 폭포 꼭대기에 올랐더니 어두워졌다. 겨우 폭포를 내려와서 빙폭을 올려다보니 서럽도록 시퍼런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더라. 그로기 상태인 내 짐을 남편이 다 메고 한 시간이면 되는 계곡 하산길을 두 시간 걸려 내려왔다. 차에 실려 집에 돌아와 사흘 동안 물만 마시고 자리에서 못 일어났다. 그때 ‘내려가는 것도 삶의 일부구나. 내려갈 때 필요한 에너지도 남겨두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등반도 인생도 쉬어 줘야할 때, 먹어줘야 할 때를 판단해야 하는 거다.


강 작가에게 '클라이머'는 어떤 사람들인가?

클라이머들은 자신의 의지를 통해 신의 경지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클라이밍은 정신과 육체를 동시에 진화시키는 스포츠다. 인간이 쓸 수 있는 모든 근육을 쓰는 경기로, 벽을 오르는 선수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아름답다. 하지만 추락에 대한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크럭스(제일 어려운 구간)를 넘지 못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엄청난 공포가 엄습한다. 그 순간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덜 떨리는 것을 클라이머들은 ‘오토바이 걸린다’라고 한다. 한 번 추락할 경우, 자기확보를 한 지점에서 적어도 2~3배의 거리를 추락하므로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그 공포를 극복하고 올라가야 한다. 타협할 수 없다. “가고 안 가고는 밑에서 정해졌어.”라고들 말한다. 등반을 시작하기 전, 땅 위에서의 마음가짐에 따라 등반 성공 여부의 절반 이상이 정해진다. 그만큼 정신적인 부분의 영향력이 크다.


산악인들은 등반중에 종종 죽음을 맞는다. 매년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본다. 고미영 씨가 돌아가셨을 때는 삼주 연속 알고 지내던 산악인들의 장례식장에 간 적이 있다. 어떤 산악인들은 자신들의 등반이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번에는 무사했지만 다음 번 도전에서는 죽음과 맞딱 뜨릴 수 있다. 과연 그들이 그런 상황을 감수하고 산을, 암벽을 오르게 만드는 정신은 뭘까? 암벽등반가들은 신이 허락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니체는 사람에게는 복종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신이 인간에게 말하고자 하는 건 '인간 너 자체가 창조주다.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걸 깨닫고 창조적으로 살아라.'라는 것 아닐까? 그렇게 볼때 클라이머들은 인간의 창조적인 본성에 가장 가깝게 사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인데 정작 클라이머 자신들은 오르는 행위를 즐기고 몰입할 뿐, 자신의아름다운 모습을 모르는 것 같더라. 그 아름다움을 찍어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강레아 작가의 등반사진 온라인 갤러리 http://cafe.daum.net/eclimbing/

강레아 작가 약력
본명 강신숙 

2000           신구대학 사진과 졸업
2000~2007  월간 '사람과 산' 암벽, 빙벽-등산 사진가 활동
2007           제1회 개인전 <천상의 꽃을 보다> 인사동 갤러리 룩스
2007~2010  월간 '산' 프리랜서 사진가
2010           제2회 개인전 <북한산의 사계>
2010~현재   월간 '사람과 산' 프리랜서 사진가 활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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