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교육계는 학교폭력이라는 쟁점으로 점철된 한 해가 될 공산이 크다. 학교폭력 예방을 이유로 졸속적으로 쏟아진 교과부의 무모한 정책들과 이에 반발하는 진보교육감들, 다시 여기에 대해 온갖 압박수단을 총 동원하는 장관의 고집이 뒤엉켜서 난장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체육 시간을 두 배로 늘리라는 어거지도, 담임교사를 두 명씩 두라는 복수담임제도 모두 학교폭력 예방을 미명으로 학교 현장을 아수라장을 만들며 강제되었다. 여기에 대한 진보교육감들의 이유 있는 항변은 보수언론에 의해 이념대결로 왜곡되었다. 

이렇게 한바탕 학교현장을 어지럽힌 이주호발 학교폭력 예방대책은 마침내 학교폭력 징계사실에 대한 학생생활부 기재지침을 내린 교과부에 의해 절정에 이르렀다. 거부한 진보교육감들은 이를 거부했고, 여기에 대한 교과부는 보복성 특별감사를 실시한다며 협박하고, 전교조는 기재 거부 투쟁을 선언, 다시 교과부의 징계 협박을 하면서 확전일로를 걷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부에 징계사실을  기재하라는 교과부와 그것을 거부하겠다는 진보진영의 이 대결에서 쌍방 모두 뭔가 주제를 자꾸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다. 학교폭력예방을 말하면서 교과부는 범죄자 처단을 말하고 있고, 진보진영은 인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여기서 시급한 주제는 폭력, 그것도 학교 폭력임을 짚지 못하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인 피해자 중심주의는 아예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건 피해자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가해지는 2차폭력이다.


교과부는 이 문제를 기강과 권력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비록 대 놓고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이들의 학교폭력 예방대책이 한결같이 일진이나 이른바 짱을 제압하는 방안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교과부의 눈에는 교과부를 정점으로 하고 교사를 말단으로 삼아 학생들을 통제하던 권력의 사슬이 무너지는 것이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니 교과부의 학교폭력 대책은 한결같이 일진, 짱, 혹은 주먹쓰는 학생을 겁주고 제압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심지어 문예체에서 오직 체육만 따로 떼어 유난히도 강조하는 정책의 배경도 의심스럽다. 

학교폭력은 어떤 이유로든 더 우월한 지위에 있는 학생이 약자의 위치에 있는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강자를 제압하자는 교과부의 이런 정책 방향에는 일정부분 타당한 면이 있다. 이건 진보진영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교과부는 이 우월한 지위가 반드시 주먹의 세기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과, 경쟁적인 분위기와 학생들의 긴장상태가 폭력적 행동의 원인이 된다는 점, 그리고 부모와 교사들의 폭력행사가 폭력에 허용적인 학교풍토를 조성한다는 점에 눈감고 있다. 

학업 지상주의적 정책을 계속하고, 학생간 학교간 경쟁을 조장하며, 학생인권조례에 딴지를 걸며 교사와 학교측의 폭력적 통제를 방조하는 교과부의 행태는 마치 학교폭력이 문제가 아니라 주먹이 센 학생들의 폭력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교과부의 학교폭력 대책은 주먹이 아니라 재력과 지능에서 우월한 가해자들의 교묘한 비신체적 폭력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그런데 교과부와 대립하고 있는 진보 진영의 문제의식은 더 심각하다. 이들은 얼른 보아 학교폭력문제와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교조를 비롯한 진보진영에서 학교폭력 가해자에 대한 단호하고 분명한 비판의 자세를 보여준 경우는 찾기 어렵다. 학교폭력에 대해 진보진영은 가혹한 입시경쟁과 학교의 체벌, 그리고 빈부격차와 생활고에서 비롯된 가정폭력을 원인으로 든다. 이 논리는 고상하고 우아하지만 현실에 대해서는 무력하며 심지어 무책임하다. 이 논리를 따라가면 학교폭력 가해자가 어느새 잘못된 제도와 사회구조의 희생자로 둔갑하며, 심지어 폭력행위가 잘못된 제도와 사회구조에 대한 울분과 발산으로 정당화되기까지 한다.

사실 이른바 진보진영이 폭력배 혹은 양아치에 대해 온정적인 시각을 보여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 집권 10년 동안 양산된 조폭영화들은 ‘올드 보이’를 제외하면 조폭들을 마치 의적 쯤 되는 것으로 묘사했다. 동료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두르고 교무실에서까지 깽판을 치는 깡패학생을 미화한 영화를 당시 진보진영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침을 흘리며 칭찬했는지 차마 인용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어쨌든 폭력배고 나쁜 놈들 아니냐는 정당한 지적이라도 들려오면 “가진 자들이 저지르는 더 큰 구조적인 폭력에 비하면 이건 다만 저항이며 분출일 뿐이다”내지는 “권력자와 부자들의 추악한 범죄에는 침묵하면서 가난한 집 학생들의 사소한 짓거리를 죽을죄로 만드느냐?”는 식의 이상한 적반하장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심지어 1999년에는 “폭주족을 위한 변명” 이라는 칼럼에서 오토바이 요란하게 타면서 중산층의 단잠 좀 깨우면 어때 식의 논리를 펼치는 소위 진보지식인이 등장하기까지 했다. 스스로 고백했듯 B급 좌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발상이다.

학교폭력 징계사실의 생활기록부 기재를 놓고 벌어진 갈등사태에서도 교과부와 진보진영의 이런 잘못된 사고방식은 여지없이 충돌했다. 교과부는 장관이나 교장도 아닌 주제에 감히 학생들에게 권력을 행사한 버르장머리 없는 일진과 짱들을 협박할 용도로 이 무기를 활용하고자 한다. 진보진영은 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면서 기재를 거부한다고 나섰다. 학교폭력 가해자가 이미 인권을 침해한 학생들이니 제재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강제로 교사들에게 주홍글씨를 새기라는 교과부의 조치가 더 큰 제도적 폭력”이라는 동문서답으로 일관했다. 이들은 모두 학교폭력 피해자의 관점에 서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였다.

교과부의 시선에는 규율과 기강만이 들어있다. “징계기록 5년 이상 보존”과 “대입에 반영”을 연결 지으면 학교폭력이 가장 빈번해지는 중2, 중3때의 징계기록을 고스란히 대학입시에 반영하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건 명백한 협박이지 교육이 아니다. 피해자의 눈으로 사태를 보면 지금 필요한 것은 폭력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 이미 당한 폭력에 대한 보복과 협박이 아니다. 만약 징계사실이 기재된 가해자가 일단 적히면 지울수도 없으니 이판사판으로 폭력을 업그레이드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
 

진보진영은  “친구 옆구리 한번 찌른 것만으로도 기재된다면 너무 큰 인권침해 아니냐”는 말이 보여주듯 상대적으로 사소한 폭력(?)으로 주홍글씨를 받게될 가해자들의 인권을 걱정하면서 이에 맞서고 있다. 이건 폭력에 대한 둔감성과 가해자 중심주의적 시각이 역력한 매우 문제 많은 관점이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폭력이건 친구 옆구리를 찌른 것이건 그건 가해자나 3자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피해자가 판단할 일이다. 피해자가 폭력이라고 받아들였으면 폭력인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비단 성폭력에서만 행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더 우월한 상대로부터 약자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에 적용되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별것 아닌 폭력을 행사하고 너무 가혹한 처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식의 진보진영의 논리 속에서는 피해자 중심주의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둔감한 사람들이니 운동단체에서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도 “그만한 일을 가지고 인화를 깨느냐?”며 덮고 넘어가려 한 것 아닐까?

그러니 진보진영은 교과부의 저 무모한 지침에 대해 인권침해 운운하며 맞서지 말라.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이며, 학교폭력을 추방하기 위한 실질적이고 교육적 조치이지 아무런 효과도 없으면서 심지어 가해자의 반성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반교육적인(반인권적인이 아닌) 주홍글씨가 아니라고 반박해야 한다. 물론 피해자 관점에서 필요한 교육적 조치들을 실제로 제시할 수 있는 교육적 실력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지금 양 진영은 피해자들은 팽개쳐 두고 기강·규율 대 인권이라는 엉뚱한 대립구도 속에서 양보없이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 이런 그들에게 몽테뉴가 남긴 이 말을 전해주고 싶다. "고집은 어리석음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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