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다양성’과 ‘자율성’은 20년 전만 해도 진보교육자들의 담론이었다. 다양성은 획일적인 군사독재의 이데올로기 교육, 정답만을 강요하는 입시교육을 반박이며 자율성은 정부가 위에서 결정하여 내리 먹이는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정책에 대한 거부였다. 이때 까지만 해도 획일성 대신 다양성, 명령 대신 자율만 쟁취하면 참교육은 다 이루어지고 교육계에 민주주의가 정착될 줄 알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교육담론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다양성과 자율성을 외쳤다. 이들은 고교평준화를 획일적인 교육의 대명사로 공격했다. 고교평준화 때문에 고등학교들의 특성이 살아나지 않아 획일적인 교육만 하게 되고, 공교육에서 충족되지 못한 다양한 교육수요의 충족을 위해 사교육 시장이 팽창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율화도 외쳤다. 그런데 이들은 내리 먹이는 권위적인 존재의 자리에 교육당국과 교육자를 모두 망라한 이른바 교육 공급자를, 참여하고 민주적인 결정을 할 주체의 자리에 학생과 학부모(결국 학부모)를 망라한 교육 수요자를 놓았다.

이로써 교육의 다양성과 자율성은 교육 수요자의 다양한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교육 공급자들이 다양한 교육방식을 개발해서 경쟁해야 하는 교육 시장화의 핵심용어가 되었다. 여기서는 교육의 가치가 아니라 ‘고객이 왕’이라는 시장의 가치가 작용한다. 고객의 요구가 우선이라는 점에서의 자율성이며 고객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업자들이 무한 경쟁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다양성이다. 이것이 구체화된 슬로건이 바로 “학부모의 선택권 강화”다.

그런데 이는 현실을 호도해도 이만저만 호도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나라 교육정책이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리 먹여져 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리 먹임의 대상은 학부모나 학생이 아니라 1차적으로 교사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어떤 공문이나 지침도 교사들에게 내려가지 학부모들에게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한 번도 뻔뻔하고 거만한 교육공급자의 위치에 서 본적이 없다. 반대로 학부모는 뻔뻔하고 거만한 독과점적 교육공급자들의 횡포에 이리저리 시달린 약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한국 공교육의 지배자는 정부도 교육자들도 아닌 학부모였다. 또한 우리 공교육을 이렇게 파행적으로 만들어 놓은 범인도 학부모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상류층 혹은 주도적인 학부모다.

이명박 정부 이전에 어떤 정부도 공식적으로 입시교육을 표방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육 그러면 입시교육이 떠오를 정도로 이미 입시교육은 오래전부터 우리 교육의 척추까지 파고들어 있었다. 공식적인 교육과정이 아무리 홍익인간, 전인교육을 떠들어도 학교 현장에서는 “닥치고 입시”가 횡횡해 왔던 것이다.

이미 30년 전에도 음악, 미술 시간에 국영수 보충수업을 시킨 일은 아주 빈번하게 있었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왜 준수하지 않느냐?”며 항의하는 학부모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도리어 음악, 미술, 체육을 교육과정대로 고등학교 3학년에게도 정상수업 시킨 학교가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이 얼마나 다양한가? 획일적인 국가교육과정을 다양하게 변주시켜서 음악, 미술 대신 수학, 영어를 했으니 말이다. 이 얼마나 학부모 선택권에 충실한가? 학부모가 요구하면 정규 교육과정까지 뜯어 고치고 불법 수업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공교육은 획일적인 교육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공식적으로는 어디에도 규정되지 않은 입시교육이 교육과정을 깡그리 무시할 정도로 무정부 상태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무정부 상태에서 세력을 잡은 것은 유력한 학부모들과 교장의 연합권력이며, 이들이 바로 입시교육을 정착시킨 범인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획일적이지 못해서, 또 학부모 의 권력이 너무 세서 문제가 되어 왔던 것이다.

교사, 교육학자, 교장 등을 비롯해 우리나라 교육의 공급자(!)들 중 입시교육에 찬동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들은 교육적 이유가 아니라 현실적 이유를 들어 입시교육에 마지못해 찬동한다. 그리고 이들이 드는 현실적 이유가 바로 교육 수요자(!)들의 요구다. 입시교육은 언제나 수요자(!)의 요구였으며, 이 수요자의 요구는 공식적 교육과정에서는 배척되어도, 학교 현장에서는 언제나 관철되었다. 우력 상류층 아닌 민중, 서민 학부모들은 다르다고? 그들은 단지 나서지 않았을 뿐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이렇게 다양성과 자율성의 의미가 바뀐 것을 깨닫지 못하고, 이 두 용어만 나불대면 진보인사라고 착각해서 마구 요직에 앉혔다는 것이다. 실제 이 10년간 교육당국을 책임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신자유주의자들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 결과는 다양성을 빙자한 입시명문 학교의 탄생, 선택권을 빙자한 입시교육에의 강요라는 결과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이걸로도 모자라서 노무현 정부는 교원평가에 학부모 평가점수까지 대폭 집어넣었다. 이 패키지는 학부모, 교육수요자들의 요구인 입시교육의 강화, 학교의 학원화에의 압력만 잔뜩 키우고 말았다. 이명박 정부는 이런 흐름에서 내숭을 제거하고 이를 노골화시켰을 뿐이다. 이제 우리 공교육은 ‘다수의 횡포’, 교육과 사회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가족이기주의에 사로잡힌 ‘다수의 횡포’앞에 놓인 등불이 되고 말았다. 이 횡포는 조만간에 광기가 되어 온 학교를 휩쓸 것이다.

그 광기의 한 사례가 여기 있다. 얼마 전 교과부에서 실시한 인성검사 프로그램에 대해 학부모들이 집단 반발한 사태가 있었다. 우리 아이를 정신병자로 모느냐 운운하는 그런 종류의 항의 말이다. 뻔뻔한 주장이다. 실제 한국 청소년들의 20% 가까이가 우울증 소견이 있다. 친구도 알고 교사도 안다. 오직 부모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항의한 학부모들은 사실상 아이들을 미쳐도 신기하지 않을 정도의 입시지옥으로 밀어 넣었으면서 정작 “내 자식만은 멀쩡하다. 내 자식은 그럴 리 없다”라고 강변하는 것에 불과했다. 더 한심한 것은 이런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해야 할 검사이며 댁의 자녀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맞서는 교육당국과 교육전문가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부모가 항의하면 해야 할 검사도 중단하며, 학부모가 항의하면 수능 난이도도 오르내리며, 학부모가 항의하면 인문계 고등학교가 전체 70%를 차지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 우리 나라다. 학부모 선택권을 이보다 얼마나 더 강화하란 말인가?

교육은 만들어진 어떤 프로그램을 구입해서 적용하는 서비스 상품이 아니다. 교육은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가 함께 참여하는 구도의 장이고 탐구의 장이다. 물론 우리나라 교사들이 이런 구도와 탐구라는 측면에서 미진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공교육이 다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교육 수요자들의 참여가 미진해서도 아니다. 공식적인 교육과정에서 아무리 다양한 예술·노작교육을 편성하여도, 아무리 다양한 체험활동과 수행평가 등을 강조하여도, 이건 문서일 뿐, 교장·교감은 유력 학부모의 요구에 따라 입시교육 강화를 강요해왔다. 교장·교감은 이들 학부모에 대해 교육전문가로서 권위를 가지고 견해를 밝히기 보다는 훌륭한 업자의 자세로 고객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 왔다. OECD국가 중 우리나라처럼 학부모가 마구 교장에게 항의해도 되고, 학교의 소환 요구에는 바쁘다고 무시해도 되는 그런 나라가 또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모든 참여에는 책무가 따른다. 단지 요구만 하고 선택만 하는 것은 참여가 아니며, 나라의 100년을 좌우하는 교육에 그런 얄팍한 참여를 강조한다는 것은 미래세대에 대한 범죄다. 만약 학부모를 교육에 참여시키고자 한다면 학교·교사에 대해 요구하는 수요자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공동으로 책임지는 교육자로서라야 한다. 또한 내 자녀가 아니더라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나라의 교육 전체를 고민하는 그런 자세를 갖추고, 교육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전에 교육에 대해 배우고 공부하는 그런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진보교육자, 진보교육감이라면 이제 이런 학부모 독재의 끝을 볼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학부모에게 쓴소리를 하고, 학부모에게 토론을 제기하고 그러면서 제대로 된 교육의 길에 같이 동반자가 되자고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진보교육감, 그리고 그들 주변의 일부 진보교육운동가들이 아직도 다양성과 학부모 선택권 강화를 운운하고 있으니 갑갑한 노릇이다. 만약 그들이 모르고 그런다면 그건 교육자의 자격이 없는 것이며, 알고 그런다면 진보가 아니라 진상이라 불러 마땅하다.

다양성은 교육전문가인 교사들의 다양한 실천과 연구가 보장될 때 비로소 그 뜻에 값하는 말이 될 것이다. 자율성은 수요자의 선택권이 아니라 교사·학생·학부모가 어우러지는 자유로운 배움의 공동체가 만들어질 때 비로소 칸트도 인정할 수 있는 자율성이 될 것이다. 이게 바로 진보적인 교육운동가, 실천가, 그리고 진보교육감이 추구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