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한 때 밥에 우유를 말아먹고 버터나 치즈를 발라 먹던 적이 있다. 요즘은 아예 밥 대신 빵을 먹는다. 식습관이 바뀐 만큼 생활도 달라졌다. 영어마을이 생겼고, 어느 대학에선 전 과목 영어수업이 시작됐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와 2000년대 중반 한미 FTA를 거치며 경제적으로는 ‘달러-월스트리트 체제’로 불리는 미국식 세계질서에 완전히 편입됐다.

그 결과 수많은 한국인이 일자리를 잃고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지만 이들은 오히려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사지로 내모는 ‘변화’에 찬성표를 던지고 있다. 26일 개봉한 영화〈미국의 바람과 불〉을 연출한 김경만 감독은 이 같은 ‘아이러니’에 주목, 미국 중심 세계 질서에 대한 한국사회의 맹신을 ‘종미주의 60년’이란 키워드로 풀어냈다.

영화는 한 번의 내레이션도 없이 1950~60년대 대한뉴스와 미군선전영화, 독재정권의 공보처 영상 등 기록필름으로 구성했다. 김 감독은 “지시적 성격이 있는 내레이션은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경우 사실로 믿겠지만 떨어져서 보면 사실이 아니다”라며 “영상만으로 국가의 편향된 시선이 빚는 현실과의 충돌과 대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과거의 기록필름 속에는 국가가 만들고자 했던 국민들의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설명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6·25전쟁 이후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폐허의 땅에서 미국을 동경하는 ‘비참한 아이러니’에 주목했다. 김 감독은 “한미동맹과 멸공이란 이데올로기 앞에서 전쟁 중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증발해버렸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숨졌지만 사람들은 원폭으로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며 이 같은 아이러니를 설명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비난하는 뉴스와 미국의 무기개발을 칭송하는 뉴스의 대비는 이 같은 아이러니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김 감독은 “정치권력과 미디어가 합작한 결과 국민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부분에서 늘 패배해왔다. 복잡한 세계에서 다른 관점을 용인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국가보안법은 한국인에게 ‘인식의 패배’를 안긴 대표적 장치였다.

영화는 전두환·김대중 가리지 않고 한국 대통령들이 모두 미국 대통령에게 악수를 청했던 모습도 드러낸다. 김 감독은 “독재와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전두환과 김대중을 똑같이 볼 순 없지만 이들은 미국이란 지배질서를 지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만큼 ‘지배질서’는 지난 60년간 ‘충격적으로’ 공고했다.

예컨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을 무차별 진압한 전두환 군부세력의 반민주적인 폭압정치는 당시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로 여겨졌던 미국의 카터 대통령에 의해 정당성을 획득했다. 김 감독은 “80년 광주 이후 이 나라에선 지배자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미국이 용인하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지적한 뒤 “한국인들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은 이 같은 경험에서 오는 괴리감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감독은 한국사회가 스스로의 길을 모색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미국식 질서를 따라가는 현실을 비판한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인 공간을 쉽게 밀어내고 서구적인 것을 흉내 낸다. 영어는 우리가 쓰는 말도 아닌데 영어에 열중한 결과 스스로의 말을 잃어버리고 있다. ‘전통’은 팔기위해 포장된 상품이 되었고 더 이상 우리게 아닌 게 되어버렸다. 미국에 모든 이상을 맡겨버리는 한국 사회는 스스로의 모습에 대해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게 됐다.”

한국은 점점 미국이 되기만을 원하고 있다. 과거엔 파병을 하고 공장노동자로 살며 미국문화에 열광했지만 지금은 무기를 수출하고 해외에 공장을 짓고 한류를 확산시키는 식이다. “한국사회가 원하는 미래의 준거는 늘 미국에 있었고, 그 결과 사회가 이상해졌다”는 게 감독의 결론이다. 김 감독은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동경해왔다”고 말하며 “미국은 구세주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미국의 바람과 불>은 최근 화제를 모았던 〈두개의 문〉과 같이 주장보다는 사실을 다루고 피해자중심 시선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시에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전과 다른 느낌의 다큐멘터리라는 평을 얻고 있다. 김경만 감독은 “사회문제가 단순하게 요약될 수 없으며 과거처럼 행동을 요구할 만큼 사람들의 인식이 강하지 않다는 점을 독립다큐감독들이 점차 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해답이나 행동은 각자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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