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극장가에서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이 조용하지만 뜨겁게 상영되고 있다. 개봉 첫 날, 독립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상영관마다 객석을 메우는 매진 열기가 불이 붙더니 마침내 관객들의 힘으로 용산까지 상영관을 늘리는 관람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김일란, 홍지유 두 젊은 여성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지난 해 제 3회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처음 불씨를 켠 이래, 제 12회 인디다큐페스티발, 제 9회 서울환경영화제, 제 17회 서울인권영화제, 제 17회 인디포럼 등 국내 유수의 영화제에 잇달아 초청 상연된 이 가혹한 시대의 기록이 일반 관객과 만나 일으킨 불길이다.

초중고 시절, 소풍이나 백일장,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이상하게 비가 오곤 했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비와서 행사 망쳤던 기억 때문에 그 전날이면 엄마가 김밥이랑 간식 준비 제대로 해주실지 신경 쓰이는 만큼이나 다음날 날씨 걱정에 잠을 설치곤 했다. 그렇게 특별한 날이면 일삼아 비가 오는 것이 다 학교 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원래는 학교 터가 공동묘지자리였는데 공사하다가 뼈가 한 무더기 나온 걸 아무렇게나 버려서 그렇다는 둥, 운동장 자리에 원래 큰 나무가 있었는데 거기 깃들어 살던 이무기가 하루만 더 있으면 용이 될 수 있었는데 그걸 베어버리는 바람에 한이 맺혀 그렇다는 둥, 비오는 게 걱정되는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이야기 때문에도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나중에 자라서 보니 내가 다녔던 학교 뿐 아니라 어느 학교나 그런 괴담이 있었다. 학교라는 게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지어진 시설이고, 그러다보니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터 하나를 갈아엎고서 들어서면서 아마도 그 땅에 깃들어 있던 뭇 생명까지 함께 갈아엎었던 내력이 그런 괴담으로 전해져 왔지 싶다.

그런데 아직도 개발의 괴담은 현재진행형이다. <두 개의 문>은 바로 그런 도시 괴담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겨울 한복판이었던 2009년 1월 20일, 생존권을 호소하며 철거 될 건물 옥상 망루에 올랐던 다섯 명의 철거민과 이들을 진압하러 몰려간 경찰 특공대 가운데 한 명의 대원이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은 이제 ‘용산참사’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참사가 벌어지기 겨우 하루 전인 1월 19일, 오전 5시 33분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 등 약 30여 명이 최소한의 보상을 요구하러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4층짜리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에 올랐다. 개발을 밀어붙이는 거대 토건재벌이며 구청장, 서울시장은 얼씬도 않은 채 용역들만 폭력을 휘둘러대는 살벌한 상황이었으니 철거민들의 요구를 세상에 알리기에는 달리 시간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경찰은 대화나 설득, 협상은커녕 개발 사업체가 고용한 용역들과 한편이 되어 경비 병력으로 3개 중대 300여 명을 투입하고 건물을 봉쇄해버렸다. 토끼몰이 당하듯 고립된 건물에 갇혀버린 철거민들은 옥상 위에 망루를 짓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철거반에 저항하게 됐고, 경찰은 엄동설한 한밤중에 물대포를 쏘며 더욱 더 압박하더니 급기야는 1월 20일 오전 1시 22분, 농성장 옆 상가 건물 가림막에 화재가 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됐다.

그런데도 오전 6시 12분에 경찰은 또 철거민들에게 물대포를 퍼부으며 혼을 빼놓더니, 급기야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크레인으로 건물 옥상에 올려 보냈으며, 한참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나절에 오가는 사람들의 안전이고 뭐고 본격적인 진압을 시작했다. 급기야 특공대를 실은 두 번째 크레인이 올라가자 3층과 5층에서 불이 났고, 옥상에 있던 망루에도 불길이 번졌고, 불길에 타오르던 망루가 무너졌다. 불길을 잡은 다음 소방관들이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해체한 시간이 8시 30분,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작전은 사람을 살리고 보자는 마음은 처음부터 손톱 끝만큼도 없는 무자비한 방식으로 진행되더니 결국은 여러 명의 목숨을 개발논리와 자본의 폭력 앞에 제물로 희생시키고야 말았다.

영화는 사건의 참혹함이나 사건 이후의 냉혹함을 생각할 때 지나칠 정도로 차분하다. 누가 사태를 그 지경까지 밀어붙였는지, 전쟁도 천재지변처럼 극한 상황도 아닌 도시의 일상 속에서 사람이 불에 타 죽도록 몰아붙인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만 크게 흥분하지도, 분노를 공유하자고 선동하지도 않는다. 그런 참사를 저지르고서 제대로 수습하고 추스르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도 멀쩡히 유지되는 정권과 자본의 낯 두껍고 배짱 두둑한 뻔뻔함에 이미 익숙해져버린 동시대 이웃들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것처럼.

죽은 사람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불 타 오른 건물 자리에 으리으리한 새 건물을 지어 자신들의 죄를 감추고, 그렇게 벌어들이는 돈으로 또 다른 희생제물을 만들어낼 또 다른 자리를 찾아 눈 벌겋게 번뜩이는 시대에 <두 개의 문>은 사람들의 양심에 괴담을 전해준다. 학교마다 좋은 일에 비 뿌리는 이무기나 뼈다귀처럼 화려한 도시개발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묻혀버린 진실이 있다고, 그러니 지금 누리는 부귀영화나 앞으로 누릴 청사진이 그 진실을 묻고 가는 한 언제고 무너질 모래성이어야한다고, 그런데도 세상이 이토록 태연하니 영화 하나가 흥분해서 무엇 하겠느냐고 되묻는다.

그날 진압작전에 나섰던 경찰특공대장은 철거민 뿐 아니라 부하대원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수라장 같은 작전을 펼친 데 대해 책임을 묻는 법정의 질문에서 자신은 작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경찰로서 수행만 한다고 대답한다. 현장 건물 구조도 잘 모르고, 인화물질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사기업에 고용된 용역들을 방패삼아 들입다 대원들을 몰아넣은 상황에 대해 변호사가 다시 묻는다. ‘경찰’로서 말고 ‘국민’으로서도 그렇게 했겠느냐고. 그러자 그이는 또 대답한다. “네, 국민으로서 그렇습니다. 전 경찰이고, 경찰은 당연히 명령에 따르는 것이고...” 횡설수설이다. 관람객들 사이에서 한숨과 실소가 터져 나온다.

경찰이든, 철거민이든 모두 국민이다. 국민 대접을 받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해야 하고 억울해 해야 마땅하다. 부디 우리 자신이 국민임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경찰에게 세금으로 월급주고 살자. <두 개의 문>이 보여주는 망루의 불길은 그 안에 타 죽어간 사람들에게만 재앙이 아니다. 진실을 밝히지 않는 한, 밝혀낸 진실로 책임을 묻고 제대로 죗값을 치르게 하지 않는 한 도시 구석구석에서 오래오래 타 오르는 무시무시한 괴담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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