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티엄을 넘어서는 인터넷환경에 286급 신문사설. 국내언론의 인터넷관련 사설에 대한 정보화지수를 측정한다면 이런 평가가 나올 법하다.

최근 PC통신을 통한 ‘부부 교환섹스’사건과 ‘인터넷에 북한찬양 홈페이지 개설’ 사건이 잇따라 터져 나와 사회에 큰 충격과 함께 인터넷의 불건전 음란물규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는 신문사설의 시각에는 몇가지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다.

첫째, 그 내용이 과장되거나 선정적이다. 신문들은 수많은 인터넷 정보중 극히 일부일 수 있는 불건전 음란물을 마치 사이버공간 전체가 타락할 우려가 있는 것처럼 주장을 펴고 있다. ‘부부섹스’의 경우 이미 사회면에 보도된 내용을 장황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정적이며 또한 “윤리체계의 근본이 흔들린다”“갈 때까지 간 성윤리”등의 표현이 과장이다(경향 10.19/국민 10.17).

또다른 사례인 ‘북한찬양 홈페이지’ 역시 ‘안방에 들어온 인공해방구’라는 섬뜩한 사설제목을 달아 중퇴 농고생의 철없는 행동에 흥분하고 있다는 지적이다(세계 11.6). 누가 보아도 동의할 수 없는 치졸한 내용을 담은 홈페이지를 놓고 국민의 안보의식결여라며 자못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조선 11.6).

더욱이 안보상업주의에 편승해 “우리 사회는 남북 대치상황을 망각…용납하기 어려운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조선)”“당국의 대북 자세가 이러니 젊은이들의 북한인식이 동정을 넘어 찬양과 홍보로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귀결(세계)”이라며 사건의 확대해석을 꾀하고 있다.

둘째, 이들 사설이 주장하는 인터넷규제가 공허하다는 것이다. 불건전 음란물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한결같이 ‘철저한 규제’를 되뇌고 있지만 현실감각이 한참 뒤떨어져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인터넷규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불건전 음란물을 게시하는 자에 대한 형사처벌과 정보통신위원회의 심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방식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고려 없이 지나치게 규제 일변도라는 지적을 받아왔다. 그나마 이것은 국내 PC통신을 통제할 수 있을 뿐 전세계 수억명이 접속하는 인터넷은 사정이 다르다.

국내인이 인터넷을 통해 해외에 홈페이지를 개설하는 경우 단속이 거의 불가능할 뿐 아니라 주권이 미치지 않아 처벌할 근거도 없는 형편이다. 또한 인터넷의 전송경로는 현재 기술로는 통제가 불가능해 서울서 부산으로 간단한 전자우편을 보낼 때도 전세계로 돌아 전달되기 때문에 그 경로를 추적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음란물이 인터넷을 통해 들어와도 그것이 국내에서 보낸 것인지 해외에서 보낸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철저한 규제와 단속만을 주장하는 것은 공허할 따름이다.

셋째,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신문의 무관심이다. 불건전 음란물은 통제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합리적인 통제수단을 찾기 힘든 인터넷환경은 자칫 규제 만능주의를 부르기 쉽다. 그러나 이것은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에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신중함이 요구된다.

이미 국내 네티즌사이에서는 ‘인터넷규제’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지만 우리 언론은 별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인터넷 음란물의 폐해가 어느 나라보다 심각한 미국의 경우 96년 2월 ‘청소년을 위한 규제법’이 제정되면서 음란물 규제와 표현의 자유를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 법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여론이 크게 일어 96년 6월 법원으로부터 위헌판결을 받게 된다. 이때에 뉴욕타임스는 ‘인터넷의 언론자유 보장을’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법원의 입장을 적극 지지했다(서울신문 96. 6.18 제인용). 불건전-음란물의 규제는 먼저 ‘표현의 자유’가 존중받는 풍도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언론은 이러한 논쟁에서 비켜 있는 것 같다. 사이버 세계의 특수성과 인터넷매체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고 기존의 낡은 잣대로 재단하거나 계몽적 수준의 ‘철저한 규제’만을 반복 주장해서는 정보화 사회를 이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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