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대 명칭 ‘대영박물관’이 우리 사회의 의식 밑바닥에 너무도 깊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인가? 심지어는 영국인들마저도 어색(語塞)하게 생각하는 그 이름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당연하다. 

‘대일본제국’이란 말은 식민지시대를 살았던 선배 세대에게 익숙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해방되던 날 태극기를 처음 보았고, 공식적으로는 우리말 이름으로 처음 통성명(通姓名)을 했다는 그 마음에 새겨져 있을 상처의 깊이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겠다.

대영제국(大英帝國)이란 말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들었다. 무력(武力)으로 세계를 석권했던 영국을 지난 시기에 불렀던 단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도 했다. 이 ‘대(大)’자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는가.

일제가 본보기로 영국을 설정한 까닭은 효과적이었겠다. 자신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저 대영제국을 보라’는 깃발은 설득력이 있다. 일본의 입장에서 말이다. 영국과도 같은 힘을 지닌, 또 세계를 ‘다스릴’ 이유를 가진 대(大)일본을 과시하기 위해 일본이 내걸었던 대영제국이라는 깃발로 우리는 그때 과거의 영국과 만났다.

대미국 또는 대중국이란 말은 없다. 대영제국도 대일본제국도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遺物)일 따름이다. 그러나 일제시대의 관성(慣性)이 우리에게 남았다. 간혹 그 잘못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다. ‘대영박물관’이란 이름 말이다. 런던에 있는 영국의 국립박물관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을 이렇게 부른다. 왜냐고 묻는 이도 별로 없다.

혹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영국박물관의 관장이었던 데이비스 윌슨 박사는 “우리 박물관의 유일한 이름은 ‘영국박물관’이다”라고 방한(訪韓) 당시 필자에게 분명히 말했다. 일부 국가에서 ‘대영박물관’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자신은 모르겠다고 했다.

인터뷰 기사에 그의 직함을 ‘영국박물관 관장’이라고 썼더니 왜 ‘대영박물관’으로 쓰지 않았느냐면서 취재데스크와 편집기자가 확인하기 위해 각각 전화를 했다.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1983년 3월 8일 동아일보 참조)

일본의 언론도 과거 ‘대영박물관’이란 이름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공식적으로는 ‘영국박물관’을 쓴다. 일본어로 된 관광안내서 등에는 영국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이란 이름이 섞여있기는 하다. 유독 우리만 아직 거의 ‘대영박물관’이다. 필자는 이를 식민지배의 언어적 잔재(殘滓)로 본다.

일제의 흔적이 대부분 지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명칭만이 건재(?)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언론사 등이 전시회 등 영국박물관 관련 행사를 벌일 때면 제목을 꼭 ‘대영박물관’이라고 적는다. 더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제 몸피를 크게 보이고자 하는 하등 동물적 마케팅, 돈벌이 꼼수인 것이다. 치사(癡事)하고 유치한 블랙 코미디 한 토막이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말을 아는가? 일본과 조선이 하나란다.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웠고, 이 땅의 ‘언론’들이 그 때 이 말에 열렬히 박수쳤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인가? 역사를 보면 ‘말’을 바로 써야 할 이유가 절로 드러난다. 대영박물관이란 말 버리고, 영국박물관으로 바로 써야 한다. 우리는 개념 있고 줏대 바른 겨레다.

<토/막/새/김>
영국박물관, 대단하다. 쌍벽(雙璧)인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은 입장료를 꽤 받는데 무료라서 또한 대단하다. 대신 기부금을 받는다. 크고 멋진 유리그릇에 푼돈도 낼 수 있다. 초기 설립자의 의지 때문이라고도 하고, ‘약탈품(掠奪品)’이 많으면 돈 받지 말라는 국제기구 규정 때문이라고도 한다. 빼앗고 훔치고, ‘대영제국’이 수집(?)한 인류 최고 수준 유물이 즐비해 황홀하다. 이집트 로제타스톤, 그리스 엘긴 대리석, 아시리아의 날개달린 황소, 마그나카르타 등등. 한국의 국립박물관들도 돈 안 받는다. 서글프게도, 관람객이 적어서 무료로 바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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