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0일 전국언론노조 MBC 본부가 시작한 파업이 5월 8일로 100일을 맞이한다. KBS 새노조(전국언론노조 한국방송 본부)는 3월 6일부터 파업에 들어갔으니 오는 8일이면 64일째가 된다. 기업별 노조인 KBS 노동조합은 5월 4일부터 파업 대열에 참여했다. 뉴스전문 채널 YTN의 노조는 3월 8일 총파업을 시작한 뒤 7단계를 거쳐 곧 8단계에 들어갈 계획이다.

세 방송사 노조의 파업 명분은 똑같다. 대통령이 임명했거나 정권이 실질적으로 ‘파견’한 ‘낙하산 사장들’은 물러나라는 것이다. 진정한 언론은 주권자인 국민의 편에 서서 권력을 감시하고 바르게 비판해야 하는데, 세 방송사의 사장들은 정반대 방향으로 치달음으로써 ‘공영방송’을 ‘관영방송’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을 파업에 나선 언론노동자들은 특히 강조한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영국에서 국영방송인 BBC의 노조원들이 100일 가까이 파업을 계속하고 있다면 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는 KBS는 물론이고, 집권세력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방송문화진흥회가 주식의 70%를 갖고서 사장을 임명하는 MBC, 그리고 대표적 뉴스 채널인 YTN까지 무기한 파업을 하고 있다. 게다가 ‘국가기간통신사’인 연합뉴스, ‘거대 교회권력’이 소유한 국민일보의 노동조합도 장기간 파업을 계속하고 있다.

민영인 SBS를 빼면 한국의 지상파 방송체제는 불구 상태에 빠져버렸다. 뉴스뿐 아니라 교양과 연예오락도 ‘절름발이 제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이자 방송전파를 비롯한 미디어의 소비자인 국민 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국가비상사태’나 다름없다.

법률적인 의미의 ‘국가비상사태’는 ‘내우외환 또는 천재지변이나 중요한 재정 경제상의 위기, 또는 이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져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수 없는 사태’를 가리킨다. 한국의 인구 5천만여 명 가운데 텔레비전을 상시적으로 시청하는 이들 대다수는 방송의 무한파업이라는 ‘비상한 사태’를 ‘국가’가 해결해 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그 책임을 파업하고 있는 노조원들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적인 이익을 위해 파업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언론을 억압하고 국민을 기만하는 방송을 바른 길에 올리겠다는 ‘공적인 목적’을 위해 그들은 일터를 떠난 것이다. 그들은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방송사에 들어갔고, 서민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높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회사 안에서 경영진이 저지르는 불의에 눈을 감은 채, 부정한 권력을 비판하는 방송을 포기하고 ‘낙하산 사장’을 묵묵히 추종하기만 하면 한 몸의 안락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 방송사 노조들은 ‘낙하산 사장들’이 물러나면 바로 일터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는커녕 파업을 주도하는 노조 임원들의 재산 압류 가처분신청을 법원에 내거나 비정규직을 뽑아서 임시방편으로 방송을 제작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이 비상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일차적 책임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있다. 그가 공식으로 임명했거나 실질적으로 ‘임명’한 사장들에게 퇴진하라고 ‘권고’한다면, 그들이 ‘못 물러나겠다’고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이 비상한 사태에 대해 책임있는 대응을 전혀 하지 않았다. 지난 3월 12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대통령이 (방송사나) 어느 개별회사가 파업한다고 할 때마다 언급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간섭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세 방송사와 연합뉴스의 총파업을 ‘오불관언’으로 외면하자 MBC, KBS, YTN, 그리고 연합뉴스 노조원들은 4월 18일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게 ‘언론 장악과 민간인 불법 사찰’에 관한 국정조사를 하라고 촉구했다. 정영하 MBC 노조 위원장은 ‘새누리당은 언론사 파업 문제에 대해 유일하게 당론으로 의견을 내지 않은 정당’이라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다르다는 것을 국정조사를 통해 밝히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박근혜 위원장 역시 ‘유구무언’이었다.

그러자 KBS 새노조는 5월 2일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방송사 파업에 대한 새누리당의 입장 표명을 요구했다. 새노조는 “언론사 파업과 낙하산 사장에 대한 입장 표명을 촉구한 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새누리당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이것은 “지금의 언론 장악 상황을 그대로 끌고 가 정권을 재창출하고 국민의 입과 귀를 막는 선전도구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새노조는 “새누리당과 박근혜 위원장은 하루 빨리 입장을 밝히고 19대 국회에서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통해 현 정권의 언론 장악 진상을 가려내고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요일인 지난 4일 저녁 7시 반쯤 서울 여의도공원 야외무대에서 ‘방송사 공동파업 시민문화제 여의도의 눈물’이라는 이름의 시민문화제가 열렸다. 전국언론노조와 ‘식품 안전과 광우병 감시를 위한 국민행동’ 등이 공동으로 주최한 그 행사에는 파업 중인 방송 3사 노조원을 포함해서 2천여 명이 모였다. 장기 파업으로 몸과 마음이 지쳤을 법도 한데 노조원들의 표정은 밝고 씩씩했다. 진행자인 이재후·정세진 KBS 아나운서는 “오늘 문화제의 제목은 징계를 받은 이들의 눈물이기도 하고, 그동안 언론인들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던 반성의 눈물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여의도의 눈물’은 시종일관 축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KBS와 MBC에서 경영진의 압력에 밀려, 진행하던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연예인 김미화 씨는 ‘지나고 보니까 더 단단해져 있더라’면서 ‘여러분도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격려했다. 그는 “김인규 KBS 사장, 김재철 MBC 사장, 배석규 YTN 사장에게 바친다”면서 남편 윤승호 교수가 만든 노래 ‘믿을 수 없어요’를 불렀다.

잔치마당에 나온 듯, 노조원들과 시민들이 흥겨워 하는 가운데, KBS 새노조가 ‘특보’로 제작한 ‘국민 여러분께 드립니다’가 관중의 손으로 전해졌다. 그 신문의 앞 쪽에는 “‘정권의 주둥아리’ KBS···더 이상 놔둬서는 안됩니다!-편파 종결자···KBS 뉴스 보도”라는 제목이 굵직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뒷 쪽에는 ‘이명박과 김인규, KBS를 이렇게 망쳐놨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이런 소제목을 단 기사들이 실려 있었다. ‘G20 특집 3,300분, 정권홍보채널이 된 KBS’, ‘친일 미화, 독재 찬양’, ‘권력 비리는 No, 멧돼지는 OK!’, ‘수신료는 펑펑···바른 말엔 징계 칼날’

‘여의도의 눈물’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나는 함께 갔던 언론계 후배들에게 이런 감상을 말했다. “우리가 1975년 3월 동아일보사에서 강제해직 당해 거리로 쫓겨났을 때는 6개월 동안 아침마다 회사 정문 앞에서 침묵시위를 한 뒤 등사기(그때 말로는 ‘가리방’)로 찍은 전단지를 시민들에게 나눠 줬어요. 그런데 요즘 파업하는 언론인들은 최첨단 전자장비로 시민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총천연색으로 된 특보를 인쇄하니 격세지감이 드는군요.”

‘여의도의 눈물’이 끝나자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여의도공원을 나가는 노조원들의 얼굴에는 ‘공정방송’을 반드시 이루겠다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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