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1일 전교조 전국 교사대회는 전교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행사다. 역대 전교조 전국집회 중 최소 규모로 기록될 200명 정도의 참가자 규모는 그나마 몰아친 비바람 때문에 비장하기까지 했다. 어느 조합원은 “그나마 전국 각지에서 왔으니 전국교사는 전국교사 맞네”라며 자조 섞인 한탄을 하기도 했다. “89년 전교조 창설 이래 이렇게 초라하고 내용 없는 전국교사대회는 처음이다. 이거 하자고 목포에서 여섯 시간 버스 대절해서 왔단 말이냐?”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교사들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도권의 전교조 조합원만도 2만 명에 육박하니 수도권 조합원 100명 중 한명만 와도 200명은 될 터였다. 전국 각지에서 버스 대절해서 서울 올라온 교사들 외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나마 참가자들 중 일부는 기왕 서울 온 김에 더 보람있는 집회에 가겠다면서 쌍용자동차 집회가 열리는 평택을 향하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참가자 수가 아니다. 예를 들어 1986년 살벌하던 전두환 통치시절 ‘교육민주화 선언’ 집회에는 500여명이 참석했을 뿐이지만 우리나라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집회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참가자가 200명이다 2000명다가 문제가 아니라 그 집회에서 무엇을 말했고 어떤 비전을 보여 주었는가가 문제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전교조 전국교사대회는 전교조 운동 역사상 최악의 집회다. 이 집회의 슬로건은 “MB 경쟁교육 반대, 경쟁만능교육 반대, 교육개혁입법 쟁취”다. 왜 한사코 경쟁교육에 다른 수식어를 붙이는지 궁금하다. 왜 그냥 경쟁교육이 아니라 MB경쟁교육이며 경쟁만능교육일까? 왜 경쟁을 교육원리로 도입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MB식 경쟁교육만 반대하려는 것일까? 왜 민영화, 노동의 비정규직화와 유연화, 시장원리 도입, 표준화된 학업성취도 검사라는 신자유주의의 네 바퀴를 언급하지 않고, 이 원리들로 인한 교육과정의 파탄과 교육 공동체의 붕괴, 교육 공공성의 파괴, 교육 격차의 극대화 등은 문제삼지 않고 단지 “지나친 경쟁”만 문제 삼는 것일까?

집회 참가자의 수가 아니라 이렇게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이렇게 협소해진 시야가 전교조의 치욕이다. 1989년 전교조는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진 단체였기 때문이며, 지금도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들을 조합원으로 거느린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조직으로서의 전교조는 이렇게 시야가 좁아진 것이다.

사실 나는 전교조 지도부를 이루는 분들이 이렇게 시야가 협소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만큼 교육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분들을 이 땅위 어디에서 또 찾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 분들이 다른 무언가에 눈이 가려져서 차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국민의 정부’이며 ‘참여정부’의 과오다.

한 번 따져보자. 교육에 시장원리를 도입하고(경쟁교육도 그 중 하나일 뿐이다), 공공보다 민간이 더 효율적이며, 학교도 예외는 아니라는 신화를 유포하고, 일제고사 등 표준화된 학업 성취도 평가를 도입하여 학교간 경쟁을 부추기고, 자율화라는 명목으로 교과와 교육과정을 유연하다 못해 거의 해체시킨 것이 언제부터인가? 물론 그 기원은 문민정부의 이른바 ‘5·31 교육개혁안’이지만 문민정부는 5·31 개혁안을 입안만 했을 뿐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긴 정부는 바로 국민의 정부이다. 그리고 당시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사람이 교육부장관이었던 이해찬이다. 그러니 오늘날 공교육 파탄의 뿌리는 그 기원을 국민의 정부에 두고 있으며, 이주호 교과부 장관은 MB의 명을 받아서 이런 공교육 파탄 정책을 연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연장선상에서 그 정책을 보다 과격하게 집행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이주호나 당시 이해찬이나 그리고 참여정부의 김진표나 교육개혁의 방향에 대해서는 도찐개찐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파탄지경에 이른 공교육은 MB때문이 아니라 부당하게 좌파로 분류되는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때문이며, MB는 다만 그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을 뿐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그럼 물어보자. 교육과정에 ‘수준별 학습’의 길을 열어 놓은 것, 이른바 선택교과라는 미명하에 교과들을 세분화하여 그 맥을 끊어 놓은 것, 학교 다양화의 미명하에 보통교육의 기본 틀을 해체하고 학교간 등급화·서열화의 길을 열어 놓은 것, 그리하여 특목고, 자사고, 자율고, 국제고 등이 확대되거나 새로이 등장하여 일반계 고등학교는 파탄지경에 이르고, 소득 수준에 따라 다니는 학교가 달라지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 표준화된 학업성취도 검사를 통해 시도간 비교를 시도하여 일제고사의 길을 열어 놓은 것, 각종 학교평가, 교원평가, 성과급 등을 도입하여 학교 구성원의 공동체를 해체시키고 학교를 경쟁의 도가니로 몰아 넣은 것, 그리고 방과후 학교를 도입하여 김영삼 정부 때 사라졌던 야자·보충을 극적으로 부활시킨 것 등 이 모든 일들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때이다.

그렇다면 전교조는 이런 부분을 분명하게 문제제기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MB경쟁교육이나 경쟁만능교육이 아니라 경쟁을 포함하여 지난 10여 년에 걸쳐 일어났던 공교육 황폐화 전체를 문제 삼았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하면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의 과오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걸 두려워 한 것이 바로 4·11 총선의 패인이기도 하다. ‘MB심판’에 올인했다가 MB의 모든 실정이 사실은 지난 10년의 좌파(?)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반박에 그냥 훅 가고 말았던 것이다. 지난 10년의 좌파(?) 정부가 사실은 신자유주의 정부에 불과했으며, 우리는 MB를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10여년 간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일련의 흐름 전체를 심판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할 때 비로소 전망이 열리는 것이며 선거의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일도 아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 역시 자신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정책이, 즉 소위 제3의 길이 사실은 지식·정보화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체에 불과하며 오히려 양극화를 확대하여 민중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면서 후회한 바 있다. 그러면서 지식·정보화를 견지하면서도 여전히 진보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제러미 리프킨, 마뉴엘 카스텔 등을 탐독했음에 유념하자. 그것은 사실상 자신의 재임기간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책의 이름이 ‘진보의 재구성’인 것이다.

그러니 전교조는 그리고 진보 교육진영은 더 이상 MB교육심판 등을 말하지 말자. 그 대신 경쟁·효율의 교육 패러다임 대신 협력·성장의 새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낡은 교육 패러다임에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같이 포함되어 비판받게 되는 상황에 주저하지 말자. 자신의 과오를 비판받고 그것을 통해 한단계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진보적인 정치가라면 오히려 훈장으로 여길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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