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하야’ 몰리자 청와대-보수언론 ‘뻔한 물타기’

이명박 정부 ‘불법 민간인 사찰’ 실태가 드러났다. 진실을 덮고자 하는 세력과 알리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 근엄한 표정의 언론은 ‘양비론’을 앞세워 양쪽 모두를 비판하면서 본질 흐리기에 뛰어 들었다. 민간인 불법사찰 정국은 이명박 정부가 왜 그토록 언론장악에 집착했는지를 드러낸 사건이다. / 편집자 주

“이제 범국민적으로 대통령의 하야를 논의해야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민주통합당 ‘MB·새누리 심판 국민위원회’ 박영선 위원장은 지난달 30일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간인 불법 사찰 파문에 청와대가 깊숙이 개입됐으며, 이명박 대통령이 책임 당사자로 지목되자 나온 발언이다.

‘리셋 KBS 뉴스9’가 3월 30일 폭로한 내용은 언론사찰 등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 내용을 담고 있다. 경북 포항·영일 등 대통령 고향 쪽 인사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등장해 국가시스템을 우롱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19대 총선을 눈앞에 둔 여권은 초대형 악재를 경험한 셈이다.

진보언론은 물론 보수언론까지 3월 31일자 지면에 <여 “민간사찰 의혹, 대통령이 말하라”(조선일보)>, <민간인 사찰 총선 뒤흔들 ‘핵뇌관’(동아일보)>이라는 기사를 실었고, ‘대통령 하야’라는 단어가 기사 제목으로 뽑혔다.

최금락 청와대 홍보수석은 3월 31일 “(폭로 내용을) 파악해 본 결과 80%가 넘는 2200여건은 이 정부가 아니라 한명숙 현 민주통합당 대표가 총리로 재직하던 노무현 정부에서 이루어진 사찰 문건”이라고 주장하며 ‘반전’을 시도했다.

주목할 대목은 청와대 주장을 앵무새처럼 옮기며 ‘뻔한 물타기’의 도우미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언론이 있다는 점이다. KBS는 3월 31일 ‘뉴스9’ 메인 뉴스 제목을 <청와대 “사찰 80% 노무현 정부서 이뤄져”>라고 뽑았다. MBC 역시 이날 ‘뉴스데스크’ 머리기사 제목을 <청 “사찰사례 대부분 노무현 정부서 이뤄져”>라고 뽑았다.

정상적인 직무감찰과 ‘영포라인’의 불법 민간인 사찰을 동일 선상에 놓고 현 정부나 과거 정부나 똑같다는 ‘양비론’에 언론이 맞장구를 치고 나선 셈이다. 보수언론은 4월 2일자부터 본격적인 ‘물타기 공조 전선’에 뛰어들었다. 조선일보는 이날 <민주, “대통령 하야” 주장하곤 노 정부 사찰은 어쩔 건가>라는 사설을 내보냈고, 동아일보는 <전·현 정권 사찰 실체 다 밝히고 제도 수술하라>는 ‘양비론’이 담긴 사설을 실었다.

청와대가 ‘대통령 하야’ 위기에서 꺼내든 물타기 작전은 도우미 언론의 기막힌 협조 아래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청와대와 일부 언론의 ‘물타기’는 곧바로 벽에 부딪혔다. 한국일보는 4월 2일자 <청와대의 불법사찰 인식 절망스럽다>라는 사설에서 “청와대가 지난 정권 시절의 사례로 든 대규모 노동쟁의 사건들은 정확한 상황 파악과 해결책 마련을 위해 정부가 당연히 주시해야 할 일들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도리어 직무유기이고 무능한 정부이다. 문제가 된 현 정권의 불법사찰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라고 비판했다. 청와대와 보수언론이 ‘뻔한 물타기’를 시도한 까닭은 19대 총선에서 일단은 새누리당이 승리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 때문이다.

주목할 부분은 청와대가 총선을 앞두고 대놓고 선거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야당과 대립전선을 이어가며 전임 정권에 대한 새로운 폭로를 위협하는 등 노골적인 정치행보에 나서는 상황이다. 그런 청와대 행보에 대해 동아일보는 4월 3일자 3면에 <야에 ‘한방’ 날린 청와대의 입>이라는 기사를 내보내며 띄우기에 나섰다.

대통령 하야 논란이라는 최대 위기에서 청와대 구하기에 나선 것은 일부 언론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임기 동안 왜 그토록 ‘언론장악’에 집착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민간인 사찰은 여권 입장에서 초대형 악재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얕은 수’로 집중포화를 잠시 넘길 수는 있지만, 문제의 근본해결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마이뉴스 팟캐스트 방송 <이슈털어주는남자>가 ‘특종보도’를 이어가는 등 언론의 추적보도도 계속되고 있다. 트위터 등 SNS에서는 정권 편향 언론의 ‘권언유착’ 실태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19대 총선을 앞두고 ‘정권 심판론’을 자극하는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히 젊은 세대의 투표 참여 행렬로 이어질 경우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총선 접전지역에서 여권에 결정적인 악재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방송인 김제동씨를 사찰했다는 폭로에 이어 국가정보원이 김씨의 노무현 전 대통령 1주기 추도식 불참 압력을 넣었다는 폭로가 이어지면서 여권은 긴장의 눈으로 사태 추이를 바라보고 있다.

신경민 민주통합당 대변인은 “김제동, 김미화씨 등 방송인에 대한 사찰과 강제퇴출은 MB정부 방송장악을 위한 의도적 사찰이자 정치적 탄압이었다”면서 “민간인 불법사찰 청문회와 함께 이와는 별도로 방송장악진상규명 청문회가 반드시 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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