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31일 서울 중앙시네마 한편에 있던 독립영화전영관 인디스페이스가 문을 닫을 때 영화인과 관객들은 벽에 아쉬움을 담은 글들을 남겼다.

관객들이 독립영화를 맘껏 볼 수 있는 공간은 곧 제작진이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꿈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당시 운영진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남겼고,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민간독립영화전용관 건립을 추진했다. 깜깜무소식이었다.
 
2년이 훌쩍 지나 이들이 기쁜 소식을 알려왔다. 서울 광화문 미로스페이스 1개관을 빌려 쓰는 조건으로 인디스페이스가 새로 출발한다는 것. 지난달 28일 밤, 인디다큐페스티발 폐막식이 열린 홍대에서 김동원 감독을 만났다. 김 감독은 재개발과 도시빈민을 3년 동안 추적한 <상계동올림픽>, 무려 12년 동안 비전향장기수를 만나며 이들의 삶을 담은 <송환> 등을 연출한 대표적인 독립영화인으로 전용관 설립을 주도해왔다.
 

   
 
 
김동원 감독은 “110석의 작은 공간이 독립영화인들에게는 최후의 근거지”라고 얘기했다. 왜 그럴까. 현재 독립영화는 멀티플렉스의 몇 개 스크린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인디플러스 등에서 상영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적했듯 한계는 뚜렷하다. 상업영화에 익숙해진 관객이 볼만한 작품이나 하루에 한 차례, 그것도 매일 상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소 대중성이 떨어지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다룬 작품이 상영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영진위는 4대강 사업을 비판적으로 다룬 <강, 원래> 상영을 거부했고, 제주해군기지 문제를 다룬 <잼 다큐 강정> 상영을 계속 미루다 개봉한지 40일이 훌쩍 넘은 뒤에야 상영을 결정했다.
 
김동원 감독은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몇몇 극장을 '피난처'라고 표현했다. 1980년대부터 독립영화 운동을 해 왔지만 성과는 작품 뿐이었다. 지원제도나 배급, 상영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감독들조차 자의로 타의로 상업영화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최근 ‘웰메이드’라고 평가받는 몇몇 독립영화를 예로 들며 “영화의 메시지가 ‘나 이제 상업영화 할 준비됐어요’라고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름 있는 감독들도 타협을 시도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인디스페이스는 이들에게 ‘타협하지 말고 다양한 실험을 하라’는 격려다. 다양한 영화가 상영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독립영화인에게 인디스페이스는 최후의 근거지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김동원 감독은 “독립영화인들을 묶어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인디스페이스”라고 했다. 하지만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까지 2년여가 걸렸고 난관도 많았다. 지난해 3월 공식적인 추진위원회를 띄우기 전에도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계약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6월 건립을 바라는 사람을 모아 발기인대회를 연 뒤에도 결과는 같았다. 9월과 12월, 두 차례 계약서에 도장을 찍기 전에 실패했다.
 
그 와중에 유혹도 있었다. 김동원 감독은 대형 멀티플렉스 사업자가 ‘스크린을 몇 개 내줄테니 와서 하라’고 제안한 사실을 얘기했다.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감독은 “‘처음’이라는 의미, 독립영화전용관을 바라는 관객과 영화인들 때문에 배반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자본의 선의를 받아들여 만든 극장은 결국 자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독립영화가 배고픔의 대명사인 이상 관객이 들지 않아 임대료를 제때 낼 수 있을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독립영화는 대중성보다 예술성에 집중하고, 대중의 기호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세간의 평가 때문이다.
 
김동원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2007년 인디스페이스가 문을 열면서 독립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며 “그때부터 제작편수도 많아지고 전용 배급사도 생겼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때부터 <워낭소리>, <똥파리>같은 독립영화도 흥행하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극장의 존재가 영화제작의 동력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인디스페이스가 “독립영화의 촉매제”가 되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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